즉흥! 재즈의 본령! 키스 자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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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연주가 불가능할 것 같은 뵈젠도르퍼에 앉아 공연을 한 키스 자렛과 이를 명반으로 녹음한 만드레드 아이허는 물론 어렵사리 피아노를 구하려다 실패한 소년 에릭에게도 감사를 드려야 한다.

2017년도 대학수능시험 영어 문제에서 재즈팬으로서는 무척이나 반가운 지문이 출제되었다. 재즈는 몰라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은 맞힐 수 있는 그런 문제였다. 재즈 음반에 얽힌 예화를 순서를 뒤섞어 출제하고 이를 원래 순서대로 배열하라는 문제였다. 출제자들이 섞어 놓은 사례를 정답대로 배열하여 축약하면 이런 얘기다.

1975년 독일 쾰른. 17세 소년 에릭 브란데스는 쾰른 오페라하우스의 공연기획 일을 하고 있었다. 이 젊은 공연기획자는 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의 단독공연을 준비하였고, 정통 클래식 전문 공연장인 오페라하우스는 일찌감치 매진되었다. 공연 당일 오후, 이 젊은 기획자가 키스 자렛과 그의 프로듀서 만프레드 아이허에게 저녁에 연주할 피아노를 보여줬다. 두 사람은 몇 번 연주를 해보더니 난색을 표했다. 좀 더 완벽한, 아니 최고 수준으로 완벽한 피아노가 아니라면 연주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백방으로 찾았으나 키스 자렛이 원하는 뵈젠도르퍼 피아노를 구할 수 없었고, 결국 상태가 좋지 않은 작은 크기의 뵈젠도르퍼 피아노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1945~ )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1945~ )

키스 자렛은 연주를 사양했다. 이런 피아노로는 연주를 할 수 없다며 공연장 밖으로 나가서는 차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침 비가 내렸는데, 키스 자렛의 눈에 비를 흠뻑 맞고 있는 젊은 기획자가 보였다. 몇 시간 후 키스 자렛은 도저히 연주가 불가능할 것 같은 뵈젠도르퍼에 앉아서 공연을 시작했다. 키스 자렛은, 영어 문제 지문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피아노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남을 연주를 선보였다. 피아노의 부족한 울림을 극복하기 위해 그의 왼손으로 엄청난 음량으로 반복적인 베이스 리프를 연주했다. 발코니석에까지 소리가 들리게 하기 위해 키스는 피아노를 정말 강하게 연주해야 했다. 키스는 일어섰다가 앉으며 불가능한 피아노를 연주해 독창적인” 연주를 했다.

이상이 2017 수능 영어 문제인데, 영어 능력 측정을 위한 지문이라는 점에서는 덧붙일 말이 없지만, 재즈사의 한 페이지를 제대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한두 가지 사실들이 좀 더 확인될 필요가 있다. 17세 소년 에릭이 ‘공연 보조 아르바이트’였는지, 지문에 나오듯 ‘공연기획자’인지, 그리고 키스 자렛이 연주한 피아노의 제작사가 ‘뵈젠도르퍼’인지, 아니면 그가 늘 연주해온 ‘스타인웨이’인지 등은 따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강력한 압력이 느껴지는 중저역의 서늘한 감각을 떠올려 보건대, 뵈젠도르퍼일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다.

중저역대 화성 전개로 ‘의외의 명연’ 남겨

이 연주가 있었던 날은 1975년 1월 24일이었고, 그날은 영어 지문처럼 피아노 상태도 엉망이었지만 오랜 장시간의 자동차 투어 후에 쾰른에 도착한 참이라서 키스 자렛 본인도 만성피로에 시달리던 중이었다. <인생 훈화집> 같은 책에 나올 만한 소년 에릭과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예술적 교감은 아마도 작은 흔적은 있었겠지만 지문에서처럼 비가 내리는 가운데 우아하게 벌어진 ‘감동적인’ 에피소드였는지는 좀 더 확인이 필요하다.

확실한 것은 이날 피아노 상태가 양호하지 않아서 키스 자렛은 고음부의 화성 전개를 거의 포기하고 중저역대만을 집중적으로 타건하여 의외의 명연을 남겼다는 점이다. 바로 키스 자렛의 즉흥 세계를 대표하는 솔로 앨범 <쾰른 콘서트>가 그것이다. 이 앨범으로 키스 자렛은 독일 그래미상과 <타임> 선정 최우수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재즈의 핵심은 스윙과 즉흥. 그밖의 많은 요소들이 재즈를 구성하지만, 이를테면 멜로디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다채롭게 전개해나가는 ‘콜 앤 리스펀스’나 재즈 특유의 ‘싱커페이션’(당김음), 혹은 대체로 너댓 명이 밴드를 구성해서 무엇보다 ‘인스트루멘털’, 즉 연주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점 등은 굳이 재즈가 아니더라도 여러 다른 장르에서 발견되는 요소다.

반면 스윙과 즉흥은 재즈의 형식과 내용, 그 핵심이다. 다른 장르에서도 더러 찾아볼 수는 있지만, 유독 재즈에서 강렬하게 확인되며 무엇보다 이 요소가 없으면 재즈 자체가 붕괴되는 요소가 바로 스윙과 즉흥이다.

스윙은 일단 청각적으로 쉽게 확인되는 형식적 요소다. 그것은 재즈의 스타일이며 흔적이며 숨소리다. 스윙 없는 재즈는 마치 ‘진보적 보수주의자’나 ‘둥그런 삼각형’ 같은 형용모순의 말들이다. 재즈의 형식, 재즈의 스타일, 재즈의 숨결, 재즈의 맥박은 기본적으로 ‘스윙’이다.

즉흥은 그날그날의 연주가 어디를 향하여 어떻게 전개될지 연주자조차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일단 태어난 생명은 죽음에 이를 데까지 필사적으로 살아야만 되듯이, 한 번 출발한 연주라면 어떤 방향으로든 달려가야만 하는 재즈의 숙명과도 같은 본질적 내용이다. 즉흥은 단순한 연주 감각이나 공연 과정의 잔재주가 아니라 궤도 없는 곳에 궤도를 만들고, 갈 수 없는 길로 거침없이 뻗어나가는 재즈만의 문법이다. 세상의 수많은 음악들은 적어도 각 나라의 민속음악을 제외해놓고 보면 대체로 일정한 오선지가 있고 그 위에 그려진 음표를 따라 전개된다. 클래식의 경우 그 음표들을 벗어나면 안 된다. 음표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되고 템포 하나도 임의로 변경해서는 안 된다. 일반 대중음악도 클래식만큼은 아니더라도 일정한 규칙을 따르는 것을 전제로 한다.

반면 재즈는 비록 악보가 있고 멤버들끼리 약속을 하여 연주를 시작하지만, 시발역은 있어도 종착역은 없는 기차처럼 연주가 진행되면서 동시에 작곡이 병행되어 연주자들끼리도 어디로 갈지 모르는 광대한 즉흥의 세계로 자유자재로 펼쳐지는 것을 숙명으로 한다. ‘Autumn Leaves’ 같은 유명한 곡은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빌 에반스, 쳇 베이커, 오스카 피터슨 등 연주자마다 달리 연주되며 심지어 같은 사람이 이 곡을 여러 차례 연주한 것을 들어보면, 그날의 공연장 상태나 연주자들끼리의 케미에 따라 천변을 일으키고 연주자 본인의 감각적 명령에 따라 만화를 펼쳐낸다. 작곡과 동시에 연주가 펼쳐지고 방금 들린 그 소리들은 새로운 소리에 묻혀 영원 속으로 아득히 봉인되어 버리는 세계가 재즈다.

50~60년대 영광을 잃어가던 재즈 지켜내

키스 자렛은 1970년대 이후 젊은 백인들의 록 음악과 젊은 흑인들의 펑키 음악, 그리고 이 둘이 합쳐지는 1970~80년대의 댄스 뮤직 열기에 의하여, 과거 1950~60년대의 영광을 잃어가던 재즈 세계를 끈질기게 지켜낸 뮤지션이다.

아, 물론 동영상 사이트에서 키스 자렛의 공연 영상을 보면, 이상의 설명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이미지와 달리, 마치 화장실이 급한 사람처럼 피아노 건반 앞에 서서 쉼 없이 허밍을 하면서 연주하는 모습이 다소 ‘이채롭기는’ 하지만, 그는 스윙과 즉흥이라는 재즈 언어를 단단하게 지켜냄은 물론 유럽의 클래식이나 아메리카의 블루스 전통을 즉흥의 세계로 끌고 와서는 가히 세상의 모든 음악을 재즈의 즉흥이라는 용광로에 집어넣어 미증유의 신음악으로 재탄생시켰다.

키스 자렛은 평생의 음악 동료들인 게리 피콕(베이스)과 잭 디조넷(드럼) 등과 함께 발표한 2003년도 앨범 속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이제 세상은 심각할 정도로 시심(詩心)을 상실했다. 위대한 가치를 열망하는 것도 마치 과거에나 있었던 일처럼 비쳐진다. 친숙한 것은 모두 모방이며, 눈에 보이는 것도 그저 마케팅의 결과일 뿐이다. 돈과 명성만이 동기를 부여하는 세상에서 고결함을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도대체 왜 음악을 연주해야 하는 것인가? 과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미 그 해답은 1975년 겨울에, 비 내리는 쾰른의 오페라하우스에서 그가 제출한 바 있다. 명반 <쾰른 콘서트> 말이다. 수능 영어 지문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연주하기 어려운 뵈젠도르퍼를 한 시간이 넘도록 어루만진 키스 자렛과 취약한 공연 상태에서도 명반으로 녹음한 프로듀서 만드레드 아이허는 물론 어렵사리 피아노를 구하려다 실패한 나머지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고 하는 소년 에릭에게도 감사를 드려야 한다. 재즈! 그 핵심인 즉흥! 그 무섭도록 놀라운 상상과 신비스런 재즈의 힘을 증명한 명연주·명음반의 주인공들이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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