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와 거장들의 진정한 상상력과 독창성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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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학문 분야에서 놀라운 위업을 이룬 거장들은, 때로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한두 마디 쓰고는 하는데, 그런 문장을 만날 때는, 그 분야에 대해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읽어오고 생각해 온 궁리의 이력들을 새삼 돌이켜보게 만든다.

책을 읽다 보면, 특히 대가들이나 거장들이 쓴 책 중에서도 그 대가와 거장들이 스스로의 삶을 정리한 책을 읽다 보면, 따로 주석이나 독후의 감정을 달 것도 없이 그냥 그 문장 그대로 옮겨서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미완의 시대>다. 홉스봄의 자서전이다. 그 중 이런 대목은 이 겨울을 광화문광장에서 보낸 사람들이라면 금세 공감할 것이다.

“육체적 경험과 맹렬한 격정이 가장 깊이 맞물린 활동은 누가 뭐래도 섹스겠지만 그 다음 가는 것은 바로 뜨겁게 달아오른 분위기에서 대중 시위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결국 개별적으로 경험하는 섹스와는 달리 대중 시위는 집단적 성격을 가지며 적어도 남자의 경우에는 순간으로 끝나는 섹스의 절정과는 달리 대중 시위에서 맛보는 희열은 몇 시간이나 이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섹스와 마찬가지로 시위에 나선 사람은 걷고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육체활동을 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개인은 집단 안에서 일체감을 느끼고 집단과 하나가 된다.”

(왼쪽부터)재즈피아니스트 텔로니어스 몽크(1917~1982), 1월 2일 향년 90세로 타계한 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인 존 버거. / 정윤수

(왼쪽부터)재즈피아니스트 텔로니어스 몽크(1917~1982), 1월 2일 향년 90세로 타계한 소설가이자 문명비평가인 존 버거. / 정윤수

아예 재즈 평론 전문가로 활동했던 홉스봄

이런 대가들은, 특정한 학문 분야에서 놀라운 위업을 이룬 거장들은 때로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한두 마디 쓰고는 하는데, 그런 문장을 만날 때는 그 분야에 대해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읽어오고 생각해 온 궁리의 이력들을 새삼 돌이켜보게 만든다. 바둑의 고수들이 아마추어의 착점에 대해 한두 마디 언질을 하면 그 아마추어가 자기 바둑의 모든 이력을 송두리째 복기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홉스봄으로 예를 들면, 나는 그가 쓴 미술사에 관한 글들을 통하여 그동안 읽거나 보거나 하면서 궁리해 온 서양미술사의 어떤 지점들을 광범위한 시야 속에서 다시 포착하게 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홉스봄의 ‘좌파 예술에 나타난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는 근대 유럽의 혁명(특히 프랑스)과 노동운동의 전개 속에 나타난 정치적 미술에 배어 있는 모더니티의 정신적 풍경을 살필 수 있는데, 이는 서양미술사를 장르 내부적으로 접근한 교과서들에서는 들을 수 없는 예리한 훈수다.

물론 그는 좁은 의미의 분과 학문이라는 측면에서 ‘예술사’를 전공한 학자가 아니므로, 바로 위에 언급한 논문의 주석에서 스스로 밝히듯이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사실의 선택과 해석에 대한 비판적 논평을 듣기도 했는데, 그렇기는 해도 역사학의 대가가 날카롭게 짚어내는 미술사의 어떤 지점들은 귀담아 들을 만한 예리한 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다시 확인하건대, 홉스봄의 ‘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은 편년체의 예술사나 미술사 교재에서는 볼 수 없는 대가다운 통찰이 있다.

홉스봄은 사실 미술보다는 음악, 특히 재즈에 대해서는 어쩌다 한두 번 코멘트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프랜시스 뉴턴’이라는 필명으로 오랫동안 재즈 평론을 쓴 전문가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을 탐사한 역사학자가 재즈도 한 번 써볼까 하는 치기 어린 ‘왕성한 호기심’ 혹은 우리 사회에서도 다소 천박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 그 무슨 ‘르네상스맨’(혹자는 이런 말을 듣고 우쭐한다는데, 실은 이런 표현에는 비아냥거리는 의미가 묻어 있음을 감각적으로 알아채야 한다), 그러니까 이것저것 잡다하게 다 알고 다 쓴다는 식의 낮은 차원이 결코 아니라 20대에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전후 세대의 격렬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영국에서 전후의 황폐함과 가난의 비참함과 기성세대에 대한 절망감이 뒤섞인 그 시대에, 존 오스본의 작품 제목으로 인하여 한 세대의 집합적 호명이 된 이른바 ‘성난 젊은이’(Angry Young Men) 시대에, 홉스봄은 역사학이라는 거대한 학문세계에서 수시로 일탈하여 재즈에 흠뻑 취했고, 재즈의 거장들에게 심취하였으며, 프랜시스 뉴턴이라는 이름으로 10여년 이상 재즈 칼럼을 썼다. 그는 자서전 <미완의 시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첫사랑을 느낄 만한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 살 무렵에 나는 이렇게 음악의 계시를 받았다. 내 경우에는 재즈가 첫사랑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외모가 워낙 자신이 없다보니 나는 보나마나 인기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육체적 관능과 성욕을 억눌렀다. 지적 유희와 말에 온통 점령당한 나의 삶에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절대적 감성을 심어준 것은 바로 재즈였다.”

이런 대가의 재즈에 관한 글은 그 무슨 재즈 애호가니 평론가니 칼럼니스트니 하는 사람들이 잡다하게 늘어놓는 글들, 인터넷의 정보들을 짜깁기하거나 서로가 서로를 베낀 그런 글들로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는 예술적 지평을 얻게 된다.

홉스봄을 통하여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는 일은 드물지만, 예전에 알았던 사실에 대한 판단을 대부분 수정하게 되는 일은 흔하다. 카운트 베이시나 듀크 엘링턴 같은 스윙 시대의 거장에 대해서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홉스봄의 예리한 단평에 의거해 있다. 다시 그의 자서전을 예로 들면, 그저 스쳐지나가는 정도의 한 문장, 즉 “거기다가 몽크의 남다른 독창성에 빨려들고 정말로 훌륭한 마일스 데이비스의 <마일스톤스>와 <카인드 오브 블루> 같은 곡을 듣고 있으면 1950년대 후반이야말로 재즈의 황금시대라는 생각이 든다”는 대목에서 나는 읽기를 잠시 멈추고, 텔로니어스 몽크와 마일스 데이비스의 음반을 다 꺼내서 다시 듣게 되는 것이다.

존 버거는 아쉽게도 음악에 대해서는 촌평만

존 버거가 새해 벽두에 세상을 떠났다. 2일 영국 출생의 미술비평가이며 소설가이고 화가이며 문명비평가인 존 버거가 프랑스 파리 교외의 자택에서 향년 90세로 타계했다. <본다는 것의 의미>,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말하기의 다른 방법> 등의 저작이 있지만 특히 1972년 영국 BBC 다큐멘터리로도 화제가 된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좁은 의미의 ‘미술사’를 넘어 시각적 관점에서 해부한 근현대 문명사와 사회사의 쾌작이다. 나도 그의 저작들을 참조하여 서푼어치 글을 쓴 적이 있지만, 순전히 독서의 관점에서 아침이슬처럼 영감을 준 작품은 역시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이다. 제목은 걸작 사진에 대한 에세이적 논평집인 듯 연상되지만, 그런 책은 아니고 자연과 문명과 인간에 대한 그의 경험과 감각을 글로 썼으되 사진 이미지처럼 상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 중 하나를 인용해 본다.

“풀밭에 앉아 그 그림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고 갑자기 서늘해진 뭍으로, 아직 더운 바다로부터 미풍이 불어온다. 풀잎 조각 하나가 그림 위로 날아가 앉았다. 또 다른 그림 위론 작은 열매 하나가 날아올랐다. 양피지처럼 투명한 옥수수 이파리 하나가 근처 밭을 맴돌다가 또 다른 종이 위로 날아올랐다. 이런 비행들을 보지 못했다면 원래 그림에 그려져 있던 것으로 착각할 뻔했다. 나는 이제, 어디에다 예술과 자연, 생성과 기원을 구분하는 선을 그을지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신비에 싸여, 나는 어두워진 후까지, 닭들이 잠잠해진 후까지, 그 그림들을 응시했다.”

다시 음악 이야기, 재즈 이야기를 하자면, 존 버거는 미술과 시각 이미지에 대해서는 엄청난 글들을 남겼지만 아쉽게도 음악에 대해서는 촌평을 남기는 정도였다. 그렇기는 해도 역시 거장의 코멘트 아닌가. 다음과 같은 그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의해 나는 며칠 동안 재즈 피아니스트 텔로니어스 몽크의 음악을 듣고 또 들었다. <글로 쓴 사진> 속의 글 ‘라코스테를 입은 남자’에서 존 버거는 이렇게 썼다.

“한 죄수가 탈옥에 ‘성공하면’, 안에 남은 사람들은 마치 위대한 예술작품을 말하듯 그 위업에 대해 얘기하고 또 그것을 꿈꾼다. 그렇다. 그건 걸작품이다. 상상력과 독창성, 극기와 끈기, 계획과 집중에 있어 이 업적은 도나텔로가 제작한 피렌체 성당 제의실의 청동문들과 또 텔로니어스 몽크가 연주하는 ‘에피스트로피’에 비견된다.”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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