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적 파상력
김홍중 지음·문학동네·2만2000원
현실을 바꾸는 일의 첫 단계는 현실에 없는 것을 상상하는 일이었다. 체 게바라는 “우리 모두 현실주의자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갖자”고 했고, ‘상상력이 권력을 쟁취한다’는 68혁명의 구호였다. 하지만 21세기 수많은 사람들이 상상보다 더 끔찍한 현실을 목도한다. 9·11테러, 2008년 금융위기, 3·11 동일본 대지진, 세월호 참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내외를 막론하고 인류가 상상과 낙관으로 이뤄낸 성취와 제도들이 한순간에 기능불능 상태에 빠져 무너져내리는 것을 본다.
파상력(破像力). 무너져내리는 참혹한 현실을 직시하려는 힘이다. 사회학자인 김홍중 서울대 교수는 재난의 시대에 필요한 능력으로 상상력 대신 파상력을 제안한다. 상상력은 미래를 약속하는 힘이지만, 파상력은 어떤 미래도 약속하지 못한다. 예언하지도, 계몽하지도, 훈계하지도 못한다. 사회를 특정 관점에서 디자인, 통치, 조직하려 하지 않는다.
무언가 파괴되고 또 새롭게 만들어지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인식하고 고뇌한다. TV중계로 뒤집힌 세월호를 보며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보고, 증언하고, 또 남의 증언을 듣는다. 그러다 보면 노란 리본을 달고, 강남역 10번 출구에 포스트잇을 붙이는 것처럼 각자가 선 자리에서 파편화된 행동들이 우연하게 피어나 모자이크처럼 사회를 뒤덮어 나간다. 사회적인 것이 우발적으로 끓어오르며 새로운 길을 뚫는다. 붕괴가 역설적으로 희망과 가능성을 태동시키는 과정이다. 파상력이란 말은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만들었다.
상상력의 세계는 여전히 발전과 진보와 개발의 꿈을 대표한다. 불가피하게 미래를 장밋빛으로 물들인다. 그런 상상은 현실의 고통과 비참을 적확하게 포착할 수 없다. 파상력은 이웃의 고통, 무너지는 일상, 환멸이 나오는 시스템에서 출발한다. 파상이라는 역설적 상상이 이런 세상이라도 함께 새로운 세상을 희망할 수 있다고 위로한다.
<박은하기자 eunha999@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