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자아실현을 하지 못할 때 일종의 위기상태에 빠지며, 이는 인간에 대한 공격성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이는 한 개인이 폭력성을 띠게 되는 중요한 원인을 설명하는 동시에, 사회 전체가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이유도 설명해준다. 그러한 폭력이 자신의 내부로 향할 때 각종 중독이 발생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로 나타나게 된다. 만일 외부로 향하면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고 극단적인 경우 상해까지 가하게 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보복운전, 악플 등이 발생하는 하나의 원인을 이와 같은 사회심리적 요인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게임 중독에 대해 살펴보자. 여러 압력을 받는 환경에 놓여 있으면서 마땅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는 게 바로 게임이다. 최근 온라인 게임이나 모바일 게임의 해악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결과론적으로 그러한 해악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근본적 원인을 파악해야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랜덤박스를 유행시킨 대표 게임 ‘메이플 스토리’. / https://1boon.kakao.com/kakaogame/pocketmaple_3
게임에 빠진 사람의 뇌에서는 엔도르핀이 분비된다. 많은 사람들은 엔도르핀이 기분 좋을 때 나오는 물질로 알고 있지만, 사실 엔도르핀은 괴로울 때 분비되는 스트레스 호르몬의 일종이다. 엔도르핀은 모르핀보다 100배나 강한 작용을 하며 우리 뇌 속에 존재하는 마약이다. 엔도르핀이라는 이름 또한 ‘내인성 모르핀(endogenous morphine)’의 줄임말이다. 가짜약도 진짜약으로 믿고 먹으면 효과가 발생하는 플라시보(placebo) 효과도 엔도르핀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플라시보 복용 환자의 30~40%가 증세가 나아질 정도로, 뇌의 작용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큰 고통을 받는 상황에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뇌는 엔도르핀을 방출한다. 엔도르핀은 기분이 좋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엔도르핀이 나오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즉 엔도르핀은 고통을 잊게 하고 쾌감을 가져다주는데, 게임은 그러한 엔도르핀을 유도하는 일종의 유도체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에 중독되어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게임에 중독되기 전에 이미 상당한 고통을 받는 스트레스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의 스트레스 수준을 가늠함으로써, 게임을 하더라도 절제하면서 일상생활을 잘 유지하는 사람과 일상이 무너지는 사람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엔도르핀 분비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 다르게 말해 고통과 스트레스 상태에 놓인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기 위한 게 바로 한국 게임업계에 만연한 ‘확률형 아이템’이다. 확률형 아이템은 확률에 따라 특정 아이템을 뽑는 것을 뜻하는데,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흔히 ‘랜덤박스(Random Box)’라고 불린다. 이는 사실 로또, 경마 등과 동일한 개념이다. 랜덤박스의 원조는 넥슨의 ‘메이플 스토리’로 알려져 있다. 랜덤박스가 만연하기 이전에 게임업체들은 단순히 아이템을 팔았지만, 그보다는 랜덤박스를 파는 게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걸 알게 됐고, 이후 앞다투어 랜덤박스를 도입하게 됐다.
건전한 게이머들은 랜덤박스를 싫어하며 규제에 찬성하고 있다. 랜덤박스는 게임의 순수성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며, 게임 중독의 폐해를 보다 폭증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사행성 논란으로 확률형 아이템 자율규제가 시행된 지 1년이 넘었지만 그리 개선된 게 없다. 앞으로 업계가 혁신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규제가 도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게임 중독의 표피적인 처리가 아니라, 그것을 유발하는 사회심리학적 요인에 대해서도 섬세한 연구와 정책 마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류한석 류한석기술문화연구소 소장(ryu@peoplewa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