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분노·슬픔, 남성의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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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탐색]여성의 분노·슬픔, 남성의 반성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
경향신문 사회부 사건팀 기록 및 채록 정희진 해제·나무연필·9800원

5월 17일 서울 서초동의 한 상가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됐다. 많은 이들이 사건 현장 인근의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에 자신의 생각을 적은 포스트잇을 붙이기 시작했다. 포스트잇이 철거되기 직전인 5월 22일 밤,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 5명이 현장의 포스트잇을 최대한 카메라에 담았다. 이렇게 수집된 포스트잇 중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1004장에 적힌 텍스트가 그대로 책에 옮겨졌다.

이 책의 해제를 쓴 여성학자 정희진씨는 “평범한 시민이라면, 여성혐오가 인류 역사의 기반이라는 것은 상식”이라고 적었다. 가부장제 사회는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가르친다. 남성이 정신이라면 여성은 육체, 남성이 이성이라면 여성은 감정이다.

가부장제 사회는 ‘정신과 이성’은 ‘몸이나 감정’보다 우월하다고 가르친다. 집단으로서의 여성과 남성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기보다는, 한쪽이 다른 쪽을 내려다보는 관계다. 정씨는 “동등한 ‘여혐 vs 남혐’이 가능하다면, 이미 성차별 사회가 아닌 것”이라며 ‘남성혐오’라는 표현이 쓰이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다고 지적했다.

학자가 굳이 분석하지 않아도 포스트잇을 붙인 시민들은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1004개의 포스트잇 곳곳에서 여성으로서 느낀 두려움, 분노와 슬픔, 남성들의 자기반성이 보인다. “여자친구에게 ‘너는 조심해’라고 하는 내가 너무 미웠다”, “추모할 때조차 몰카와 테러가 두려워 마스크를 써야 하는 ‘한국 여자’”, “여자라서 살해된 것이다. 만만해서 살해된 것이다”, “여자로 안 보이려고 머리를 짧게 잘랐다.

대체 왜 이래야 하지?” 1004개의 포스트잇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추모와 관련된 단어들이다. 그대로 연결하면 하나의 문장이 되는 ‘고인’, ‘명복’, ‘빕니다’가 각각 273번, 281번, 288번 쓰였다. ‘살아남았다’라는 표현도 132번 등장했다. 이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당신은 죽었지만 나는 살아남았다”는 부채의식이 뒤섞인 표현이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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