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에 대한 고매한 목적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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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탐색]문제에 대한 고매한 목적의식

반지성주의를 말하다
우치다 다쓰루 엮음김경원 옮김·이마·1만4800원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교육가인 우치다 다쓰루는 지성을 ‘앎의 자기쇄신’으로 정의한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무지란 지식의 결여가 아닌 지식의 포화상태다. 미지의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바로 무지다. 그렇다면 지성은 지적인 틀 자체를 그때마다 새롭게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지성은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현상이다. 다음과 같은 활동들도 지성이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옛날 일을 떠올리기도 하고,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기도 하며, 미루고 있던 다림질을 하고 싶어진다면, 그야말로 지성이 활성화했다는 구체적인 징후다.” 그때까지 생각나지 않았던 일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 하고 싶어지게 된다면, 그 힘이 곧 지성이다.

반면 반지성주의자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반지성주의의 대변인은 대개 학식이 없거나 교양이 없지 않다. 오히려 지식인 나부랭이, 자칭 지식인, 동료에게 제명당한 지식인, 인정을 받지 못하는 지식인 등이다. 읽고 쓸 줄 아는 그들은 제대로 읽고 쓸 수 없는 사람들을 지도하며, 자기들이 주목하는 세계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고매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지적 정열과 이상주의는 최악의 반지성주의를 낳는다. 예컨대 반유대주의가 그렇다. 이들은 국제 정치, 국제 경제, 언론이 전부 유대인의 국제 네트워크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예상 못할 사건’ 앞에서 전문지식이 소용이 없어질 때 반지성주의자들은 무력감과 함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장본인은 어딘가에 있다는 가설을 제기한다.

반지성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무시간성이다. “반지성주의자들이 예외없이 과잉논쟁적인 까닭은 그들이 ‘지금, 여기, 눈앞에 있는 상대’를 지식과 정보와 추론의 선명함으로 ‘압도’하는 일에 열중하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자들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잘 익어가는 진리를 직감하지 못한다. 자신이 기나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수한 사람들과 시공을 초월해 협동하고 있다는 ‘떨림’을 그들은 짐작조차 못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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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