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총선 이후 한국 정치의 과제… 3당 체제는 합의제 민주주의 실험 기회
박근혜 정권이 크게 패했다. 박근혜 정권의 경제 실패, 남북관계 경색, 외교 실패, 국정원 동원 정치, 그리고 박근혜 자신의 오만한 행태에 신물이 난 국민들이 이 정권 더 이상 봐줄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정치를 빨리 끝내기를 원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수도권에서의 더불어민주당의 압승과 호남에서의 국민의당이 약진이 그 신호다. 한편 정당투표에서 전국은 물론 서울에서도 국민의당이 더민주에 앞선 것은 그동안 제1야당으로서 더민주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일정한 비토이자 더민주의 정권교체 역량에 대한 불신이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합리적 보수의 반발
박근혜 정권 심판, 더민주에 대한 경고 다음의 가장 중요한 현상은 지난 30년 동안 지속되어온 지역주의가 영호남 모두에서 균열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대구에서 야당 후보 김부겸의 당선, 부산·경남에서 더민주의 5석 의석 획득은 이번 선거에서 가장 의미있는 변화였다. 더민주와 호남의 고리가 끊어지고 전국정당의 외양을 갖춤으로써 더민주는 이제 지역정당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게 됐다. 호남에서 더민주에 대한 비토, 국민의당의 약진은 영남의 ‘자기방어적 보수주의’를 무력화시키는 역할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제 영호남 사람들 모두 지역 연고 정당보다는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치를 원하고 있다.
더민주의 수도권에서의 압승과 호남 거의 전패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물론 더민주가 자신의 중요한 기반인 호남을 충분히 배려하지 못한 데 대한 호남인들의 실망감·‘친노패권론’·‘호남 홀대론’이 먹힌 결과이기는 하지만, 더민주가 사실상 영남의 ‘새누리당’과 같은 존재로서 기득권에 안주하여 주민들에게 실망감을 준 점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서울의 정당투표에서 국민의당이 더민주를 누른 것, 강남 3구 지역에서 더민주가 선전하고 당선자까지 낸 것은 박근혜 정권의 수구보수적인 행태에 대한 합리적인 보수의 반발로 해석할 수 있다. 대구·경북이나 60대 이상 노령층의 상대적으로 낮은 투표율은 수구보수와 박근혜 정권의 막가파식 행태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4월 13일 밤, 새누리당 당직자들이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각 방송사가 발표하는 개표방송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하나둘씩 자리를 비워 썰렁한 모습을 보였다. / 권호욱 선임기자
이명박 정권 이후 지난 8년 동안 새누리당이 경제정책에서는 야당보다 좋은 성과를 낼 것으로 기대했으나, 안보는 물론 경제에서도 더욱 퇴행적인 모습을 보였을 뿐더러 간첩조작, 세월호 참사와 그 처리과정의 의혹, 국정교과서 강행, 위안부 졸속 협상 등에서 1970년대식 권위주의와 공작정치로 회귀한 것에 대한 실망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정의당 후보들, 그리고 녹색당 등 소수정당들이 지역구나 정당득표에서 모두 심각하게 패배한 것은 대통령제 하의 소선거구제, 그리고 지역 연고가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한국 정치에서 이념과 정책에 기초한 진보적 소수정당은 극히 제한적인 진출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보여주었다. 그러나 울산에서 노동자 출신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것은 새로운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어쨌든 현재의 선거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이런 진보적 소수정당의 성장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더민주의 선전이나 국민의당의 약진은 모두 당 차원의 정책이나 리더십, 잘된 공천의 결과가 아니다. 그들은 사실상 박근혜 정권의 실정으로 반사적 이익을 얻은 것이다. 이번 선거과정에서 새누리, 더민주 두 당의 선거법 협상이나 공천 등은 최악이었다. 국민의당의 경우 여야에서 떨어져 나온 외인부대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무엇을 하겠다는 당인지도 알 수 없었다. 사실 여야 3 정당의 지역구나 비례 후보 공천에서도 당의 비전, 의제, 담론을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거운동 기간에도 새누리, 더민주, 국민의당의 차이가 무엇인지 부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새누리, 더민주 모두 청년들이나 소외층을 투표장으로 인도할 유인을 제공해주지 못했다. 공급자인 정당이 이처럼 최악의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정권에 대한 불만이 너무 컸고, 정권교체의 필요성을 너무 심각하게 느꼈기 때문에 투표율은 상승했다.
결국 더민주가 제1당이 되고, 더민주와 국민의당의 의석을 합하면 과반이 넘어서기 때문에 1988년 직후, 그리고 2000년 16대 총선 이후와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여소야대의 정국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정당의 내부 사정은 매우 복잡하다. 여당도 수구보수와 합리적 보수 간에 총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호남의 거의 반이 떨어져 나간 더민주의 기반과 정체성, 그 진로는 어떻게 될까? 문재인·김종인 두 지도자가 이번 총선에서 수행한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지난 국회에서 더 민주당이 보여준 심각한 무기력과 혼란, 내부 갈등, 정책의 부재는 시급히 극복해야 할 과제다.
여소야대 정국 정당의 내부사정 복잡
가장 주목할 만한 대상은 국민의당이다. 수도권과 호남에서 국민의당의 높은 지지율은 더민주에 대한 심판, 정권교체의 기대, 새누리당에 대한 반발이 모두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더민주에 대한 비토 심리라는 ‘반사적’ 이익의 수혜자이므로 독자적 정체성을 가진 정당으로 계속 살아남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래서 이번 총선 이후의 정당구도를 더민주, 새누리, 국민의당 3당체제가 확립된 것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여소야대 정국에서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퇴행을 정리하고 망가진 사회와 정치를 복원하는 일에는 연대를 해야 할 것이며, 차기 대선,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정치를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할 것이다. 비록 완전한 3당체제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찾은 여소야대 정국에서는 어느 당도 독주를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합의제 민주주의를 실험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장이다. 특히 더민주는 2004년 열린우리당 시절 다수당이 되고도 제대로 개혁입법을 통과시키지 못했던 과거를 철저히 복기하여 개혁입법 작업을 하나하나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당은 어설픈 중도로 개혁의 발목을 잡기보다는 사안별로 더 민주당과 연대를 해야 한다.
우리는 1987년 이후 민주정권 10년, 그것에 대한 반발로 나온 보수정권 8년을 모두 겪었다. 87년 민주화의 성과는 한국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지만,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는 지역주의 정치와 소모적인 권력투쟁,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계층적 양극화, 사회 해체라는 매우 부정적인 결과도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지역정치의 고착, 대통령제의 한계, 진보정치의 실패는 가장 부정적인 현상들이다. 비례대표의 의석수가 극히 미미하고, 제왕적 대통령제가 유지되는 한국에서 정당정치는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으며, 여전히 사회적 갈등·균열구조를 거의 반영하지 못한다. 결국 정책정당으로의 변신, 정치적 리더십의 형성, 정당의 지역기반 마련을 위한 여러 가지 입법작업이 시작되어야 하고, 그것을 위한 국민적인 논쟁과 당내의 논쟁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번에도 ‘마지 못해’ 더민주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유권자들과 아예 투표에 참가하지 않은 40%를 정치의 장으로 끌어내야 정치판이 바뀐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정치세력은 모두 지역, 직능집단이 스스로 조직화·세력화·정치화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정치가 시민사회를 키워야 하고, 시민사회가 자력화·정치화되어야 한다. 정당은 시민정치의 기반 위에서만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시민이 정당원이 되고, 그 정당원이 공천에 개입하고, 아래로부터 정책 요구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낡은 것들은 이제 청산될 조짐이 보이나, 새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