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이야기

지역구도 희미, 세대투표 뚜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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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텃밭에서 많은 이변 일어나… 늘어난 2030 젊은층 투표는 야권으로 몰려

이모씨(28)는 4·13 20대 총선일에 출구조사 감독관으로 일했다. 수도권의 한 선거구에 설치된 투표소 3곳을 돌면서 투표소에 나가 있는 출구조사원들을 관리·지원하는 일이었다. 오전 6시부터 시작된 투표 행렬을 지켜보던 그는 3곳의 투표소에서 공통적인 현상이 벌어지는 것을 느꼈다. 오전부터 꾸준히 이어지던 고령층 유권자들의 발길이 점심시간대를 지나면서부터 뚝 끊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행렬을 자녀를 데리고 오는 30~40대 유권자들이 대신했다. 이씨는 “원래는 제가 보면 안 되는 건데, 조사원이 매시간 집계 결과를 본부로 보고하는 내용을 슬쩍 보니 오후가 지날수록 야당 지지율이 점점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씨가 목격한 선거일 시간대별 세대교체 현상과 그에 따른 여야 지지율 역전은 20대 총선에서 나타난 ‘세대투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지역에 바탕을 두고 투표하는 성향은 약해지고, 세대에 따라 투표 결과가 쏠리는 경향은 강해졌다. 특히 20대와 30대 젊은 유권자들의 투표 참여가 늘고, 이들의 표는 야권 표로 집중됐다. 반면 지역주의 투표성향이 강했던 영남에서 야권 의석이 크게 늘어나는가 하면, 호남에서는 이전 선거까지만 해도 압도적 다수파였던 더불어민주당 대신 국민의당이 그 자리를 꿰찼다. 20대 총선에서 나타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19대 총선에 비해 20대 총선에서 20~30대 청년층의 야권 투표 쏠림현상이 나타난 것은 분명하다.” 방송3사 출구조사를 실시한 여론조사업체 TNS코리아의 최형민 사회조사본부 차장은 20대 총선에서 더민주와 국민의당이 선전한 배경에 청년층이 자리잡고 있다고 지목했다. 청년층이 이전 총선에 비해 더 높은 투표율을 보였고, 그 표들이 야권으로 쏠리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 것이 야권의 총선 승리 요인이라는 것이다. 최 차장은 “청년층에서는 더민주 지지율이 높았지만 국민의당도 적지 않은 지지율을 얻었다”며 “국민의당이 출현해 야권 고정 지지층의 표를 갈라먹을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야권의 외연이 확장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제20대 국회의원선거 투표일인 4월 13일 서울 관악구 대학 제1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제20대 국회의원선거 투표일인 4월 13일 서울 관악구 대학 제1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청년층 투표율 야권 승리 요인의 큰 몫
이전 총선보다 더 많은 청년층의 발길이 투표장으로 향한 것은 투표율로 확인된다. 방송3사 출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 이하의 투표율 전망치는 49.4%, 30대는 49.5%였다. 전체 투표율 58%보다는 낮지만, 19대 총선에 비해 가장 큰 폭으로 투표율이 오른 연령대가 20대와 30대였다. 19대 총선에서의 20대와 30대 투표율인 36.2%와 43.3%보다 각각 13.2%포인트와 6.2%포인트가 오른 것이다. 반면 다른 세대의 예상 투표율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총선에서 54.1%의 투표율을 기록했던 40대는 20대 총선에서 53.4%, 65.1%였던 50대는 65.0%, 69.9%였던 60대 이상은 70.6%로 변동폭이 크지 않았다. 아직 선관위의 20대 총선 연령대별 투표율이 발표되지 않았지만, 19대 총선 출구조사 결과와 비교해도 청년층 투표율이 크게 오른 점은 확인할 수 있다.

청년층의 투표 참여가 활발해졌다는 사실은 총선에서는 처음으로 실시된 사전투표 결과를 봐도 알 수 있다. 선거일 전 미리 투표할 수 있는 사전투표의 투표율은 역대 가장 높은 12.2%에 달했다. 20대는 사전투표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세대로 나타났다. 선관위가 발표한 20대 총선 사전투표 연령대 통계를 보면 사전투표자 중 20대 이하의 비율이 25.77%로 전 연령대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오른 청년층의 투표율은 야권, 특히 더민주의 높은 득표율로 연결됐다. 한국갤럽이 총선 직전인 4월 11~12일 양일간 조사해 15일 발표한 ‘데일리 오피니언’ 조사자료를 보면 20대 총선에서 투표할 지역구 후보의 정당을 묻는 설문에 20대 이하 연령층에서는 35%, 30대에선 40%가 더민주 후보를 찍겠다고 응답했다. 새누리 후보를 찍겠다는 응답은 20대 20%, 30대 21%였고, 국민의당 후보라고 응답한 비율은 각각 5%, 9%였다. 반면 50대와 60대 이상에서는 새누리 후보를 찍겠다는 비율이 각각 44%, 58%였고, 더민주 후보를 찍겠다고 한 21%, 6%와는 큰 차이를 보였다.

다른 세대에 비해 청년층이 눈에 띌 정도로 투표 열의를 보인 이유로 당사자들은 ‘헬조선’이라 불리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가리켰다. “알바 월급 밀려서 못 받아도 ‘인생의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지, 방법이 없어요’라고 하는 당 대표를 보고도 새누리당 찍으면 그게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겠어요?”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취업을 준비하면서 ‘알바’ 중인 김성훈씨(27)는 지역구와 비례대표 선거에서 정당은 다르지만 둘 다 야당을 찍었다고 말했다.

[표지이야기]지역구도 희미, 세대투표 뚜렷

40대 이상은 투표율 변동 폭 크지 않아
김씨는 ‘문송하다(문과라서 죄송하다)’는 대학 인문계열 학과를 졸업한 뒤 전문직 자격증을 따려고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졸업 전 수십 군데 기업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면접까지 간 곳이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몸소 취업난을 겪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다른 건 안 바라고 지금 남아있는 일자리나마 줄이고 없애지 않을 당이 이겼으면 해서 야당을 찍었다”며 “주변 친구들 중에서 정치에 크게 관심을 보이는 친구들도 별로 없었는데, 이번 선거 때는 사전투표를 했다는 친구들이 많아 좀 놀랐다”고 말했다.

[표지이야기]지역구도 희미, 세대투표 뚜렷

‘강남벨트’ 무너뜨려 새누리에 치명타
30대 직장인들이 야권을 선택한 것도 마찬가지로 생활에서 체감하는 어려움이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직장인 유인호씨(36)는 치솟는 전셋값 때문에 30년 넘게 살던 서울을 떠나 경기도 남양주에 자리를 잡았다. 전에 살던 동네보다 집값도 싸고 어린이집 경쟁도 조금은 낮아졌다. 그래도 유씨와 아내 모두 직장이 멀어진 탓에 출근시간은 빨라지고 퇴근시간은 늦어져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데려오는 시간은 더욱 촉박해졌다. 유씨는 “결혼한 뒤로 계약 끝나고 전셋값 올려 달라고 할 때마다 서울 변두리로 밀려났는데, 결국 출퇴근시간은 길어져도 당분간은 이사 걱정 덜 수 있는 곳으로 옮겼다”면서 “집 가지고 건물 가진 사람들만 배 불리는 짓 좀 그만하라고 야당에 표를 줬다”고 말했다.

20~30대 청년층 유권자들이 자발적으로 투표에 나선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례적이라면서도 의미가 큰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민생의 위기를 만든 여당과 정부를 심판하고자 하는 청년층 유권자들의 기류는 이미 조성되었는데, 정치권에서는 그 바닥 민심을 뒤늦게야 확인했다는 것이다. 정한울 고려대 평화와민주주의연구소 교수는 “선거 이전부터 투표의향조사를 해보면 50대 이상은 투표의향이 점점 떨어졌지만 20~40대에서는 일관되게 점점 높아졌는데, 이 점이 바로 유권자들이 직접 나서서 심판 투표를 만들어낸 것을 방증한다”며 “정치권에서 단일화 혹은 1여다야 같은 구도로만 분석하는 동안 유권자들은 자생적으로 선거의 흐름을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청년층의 투표율이 높아지면서 기존의 정당 간 지역구도는 조금씩 허물어지는 효과가 나타났다. 더민주가 텃밭인 호남에서 대패하고도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하게 된 것은 세대투표의 결과로 수도권에서 대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여기에 난공불락이었던 대구에서 1석을 가져오고, 부산에서는 5석이나 확보하는 등 영남에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기존의 지역 우선 투표와 반대되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도 한몫을 했다.

영남권에서 야3당을 비롯한 범야권 후보들이 당선된 곳은 모두 13곳이다. 부산에서 더민주 김영춘(부산진 갑)·박재호(남 을)·전재수(북·강서 갑)·최인호(사하 갑)·김해영(연제) 후보가 당선됐고, 경남에서는 정의당 노회찬(창원 성산), 더민주 민홍철(김해 갑)·김경수(김해 을)·서형수(양산 을) 후보가 당선됐다. 울산에선 노동계 후보인 무소속 김종훈(동구)·윤종오(북구) 후보가 의석을 차지했다. 대구에서 김부겸 후보가 당선된 수성 갑, 무소속 홍의락 후보가 당선된 북 을까지 더하면 영남권 의석 65곳 중 13곳을 야권이 차지한 것이다.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이 탄생한 뒤 치러진 14대 총선 이후 가장 많은 야권 후보가 당선됐다.

그 정반대로 호남권에서는 기존의 맹주 역할을 하던 더민주가 3석밖에 얻지 못하는 대신 국민의당이 지역구 전체 28석 중 23석을 가져가는 저력을 보였다. 특히 광주에선 8석 모두를 국민의당이 휩쓸어 호남의 달라진 표심을 보여줬다. 호남의 지역구에서 얻은 표의 수로 따지면 더민주는 98만1982표를, 국민의당은 122만7320표를 얻었다. 정당투표에서는 더민주가 78만8964표, 국민의당이 122만9064표를 얻어 국민의당이 더민주를 눌렀다. 새누리당은 전남 순천에서 이정현 후보가, 전북 전주 을에서 정운천 후보가 당선되며 2석을 얻었다.

새누리당의 텃밭인 대구 수성 갑에서 새누리당 김문수 후보를 꺾고 국회의원에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당선인이 4월 14일 대구 수성구 범어네거리에서 출근길 시민들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새누리당의 텃밭인 대구 수성 갑에서 새누리당 김문수 후보를 꺾고 국회의원에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당선인이 4월 14일 대구 수성구 범어네거리에서 출근길 시민들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새누리당 전통적 우세지역 투표율 낮아
더민주는 호남의 압도적 지지를 잃은 대신 수도권에서 그동안 새누리당의 텃밭으로 분류돼 오던 지역구에서 선전했다. 이른바 ‘강남벨트’라고 불리는 서울 강남·서초·송파 3개 구에서 송파구 의석 3석 중 최명길(송파 을)·남인순(송파 병) 후보가 2석을, 강남구 의석 3석 중 전현희 후보(강남 을)가 1석을 가져가며 새누리에 타격을 안겼다. 19대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2석 모두 가져갔던 서울 양천구에서도 황희 후보(양천 갑)가, 서울 용산구에서도 진영 후보가 당선됐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서도 더민주의 김병관(분당 갑)·김병욱(분당 을) 후보가 승리해 16대 총선 이후 분당 갑·을 모두 새누리당과 그 전신인 한나라당이 오랫동안 지키고 있던 아성을 깼다.

지역구 의석 수로만 따지면 국민의당은 서울 노원 병의 안철수 후보와 서울 관악 갑의 김성식 후보가 당선된 것을 제외하면 수도권에서는 큰 재미를 못 봤지만 정당투표에서 더민주를 앞서는 득표율을 보였다. 국민의당은 더민주가 전체 122석 중 82석을 챙긴 수도권에서 더민주보다 16만9503표를 더 받았다. 국민의당은 서울에서 28.83%의 득표율을 올리며 새누리당(30.82%)과 더민주(25.92%) 사이에서 2위를 차지한 것으로 집계됐다. 국민의당은 인천과 경기에서도 각각 26.9%, 27%의 득표율로 더민주의 득표율 25.4%, 26.8%를 앞섰다.

이 같은 결과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거주 야권 성향 유권자들 가운데 후보투표와 정당투표를 각각 달리 선택하는 교차투표를 한 유권자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을 심판하기 위해 지역구에서는 더민주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한편, 제1야당인 더민주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유권자들이 정당투표에서 국민의당으로 쏠린 결과다.

기존의 지역구도는 약해진 반면, 세대투표는 강해진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그동안 선거 때마다 작용한 전통적 진영 개념이 흔들린 결과라고 분석했다. 여당에서는 영남권의 고령층 유권자가 투표에 관심을 잃으며 지지기반이 흔들렸고, 야당에서는 더민주와 국민의당으로 크게 분화되면서 유권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투표에 임한 것이다.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한쪽에서는 친박 구심점이, 다른 쪽에선 친노 구심점이 흔들리면서 다야 구도가 만들어졌지만 이전과는 달리 두 야당 사이에 합집합이 되는 결과가 나왔다”며 “여당 대 야당의 진영논리가 남아서 그대로 적용됐다면 여당 지지층도 결집했겠지만, 제3당이 등장함에 따라 기존 진영논리가 무색해졌다”고 지적했다.

앞서도 주목했던 청년층의 높은 투표율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지역구도와 얽히면서 3당 사이의 균형점을 찾게 됐다는 시각도 있다. 전반적인 투표율을 봤을 때 대구·경북을 비롯한 영남권과 강원권 등 전통적 새누리당 우세지역에서 투표율이 낮았다. 반면 국민의당이 돌풍을 일으킨 호남지역이 가장 높은 투표율을 보였고, 격전지가 많은 수도권에서도 비교적 높은 투표율을 보였다. 투표율의 ‘서고동저’ 현상이 나타난 셈이다. 유권자들이 투표를 통해 변할 수 있는 가능성과 선택지가 크고 넓다고 판단하는 지역일수록 더 높은 참여를 보였다고 분석할 수 있다. 김춘석 한국리서치 이사는 “젊은 유권자들이 높은 투표 의향을 보였고, 그것이 실제로 이전에 비해 높아진 투표율을 보인 것은 젊은층일수록 더 정치가 자기 삶과 관계가 크다고 느끼게 됐다는 것을 뜻한다”며 “일자리나 무상급식, 무상보육 등 정치의 변화에 따라 유권자가 살아가는 생활이 달라지는 경험이 쌓이면서 그 학습효과가 발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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