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 3분의 2, 아예 공개 안 해… 공개해도 일부만 찔끔찔끔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치과정을 전공하는 박모씨(29)는 선거비용을 많이 쓴 후보가 당선될 비율도 높은지 궁금했다. 미국과 같은 몇몇 나라에서는 정치자금을 온라인으로 공개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 떠올랐다. 자료를 찾던 중 한국에서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운영하는 ‘정치자금공개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각 선거구 후보들이 정치자금으로 얼마를 모금하고 얼마를 지출하는지 온라인으로 그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박씨는 몇몇 후보들이 제출한 정치자금 내역을 확인한 뒤 이내 실망했다. “정치학을 배우는 연구자로서만이 아니라 유권자의 입장에서 실망했다. 이름과 시스템만 그럴 듯하고 성실히 정치자금 내역을 공개한 후보를 찾기는 힘들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영국·멕시코 등 온라인 확인 가능
선관위가 마련한 ‘정치자금공개시스템’은 선거비용을 실시간 공개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어느 후보가 선거에 얼마나 돈을 쓰는지를 유권자가 더 쉽게 알아보고 비교할 수 있다. 단 각 후보들이 비용 수입·지출 내역을 재깍재깍 올릴 때에만 그렇다. 실상을 들여다 보면 유권자들의 선택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아예 공개를 하지 않는 후보들의 수가 전체의 3분의 2에 가깝고, 공개를 하더라도 일부만 올려놓아서 전체 내역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 타 후보와의 비교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4월 8일까지 정치자금을 공개하겠다고 한 총선 지역구 후보자는 전체 944명 중 377명(39.94%)이다. 새누리당은 지역구 후보자 248명 중 109명이 공개해 43.95%, 더불어민주당은 234명 중 97명이 공개해 41.45%, 국민의당은 172명 중 63명이 공개해 36.62%, 정의당은 51명 중 18명이 공개해 35.29%를 기록했다. 무소속 후보 133명 중에서는 57명이 공개해 42.85%였다.

3월 31일 경남 창원시 성산구에서 선거운동원들이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각 당의 대표인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 정의당 심상정 대표, 더민주에서 이종걸 원내대표도 각각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중구·영도구와 서울 노원구 병, 경기 고양시 갑, 경기 안양시 만안구에서 총선 선거비용으로 쓴 내역을 공개하지 않았다.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정치 1번지’ 서울 종로구를 보면 접전을 벌이고 있는 새누리당 오세훈 후보와 더민주 정세균 후보 둘 다 비용을 공개하기로 했으나 공개 내역을 보면 사무용품을 산 내역이나 사무소 임대료를 내는 등으로 쓰인 선거 외 비용만 공개되어 있다. 선거비용과 선거 외 비용으로 나눈 항목 중 핵심 항목인 선거비용 부분에 대해서는 두 후보 모두 전혀 내역을 공개하지 않은 상태다.
원칙적으로는 선거비용 공개가 법적으로 의무사항이 아니어서 후보가 자율적으로 공개할지 말지를 택할 수 있다. 하지만 공개 의사를 표명하더라도 각 후보 캠프에서 자의적으로 내역을 올릴 수 있어 후보마다 공개 기간이나 내역이 제각각인 점이 문제다. 일부 후보는 선거를 앞두고 채 5일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도 선거비용의 수입·지출 내역을 전혀 공개하지 않은 채 일부 선거 외 비용만 공개하고 있다. 당연히 후보 간 비교는 불가능하다. 선관위 관계자는 “예비후보자 등록이 시작된 지난해 12월 15일 이후의 모든 수입·지출 내역을 올린다는 것이 지침”이라고 밝혔지만 이에 따르는 후보를 찾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실시간 공개 의무화로 법 개정해야
정치자금공개시스템을 처음 구축해 도입한 2014년 지방선거에서는 후보자 중 51%가 참여했고, 2015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때는 73%까지 참여율이 높아졌지만 올해 총선에서는 참여율이 40%에도 못 미치고 있다. 현행법으로는 선거과정에서 들어간 비용을 각 후보 측의 회계책임자가 선관위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으나 그 시점이 선거 이후 30일 이내로 정해져 있다. 그 내역마저도 온라인으로 일반에 공개되는 기한은 선거 후 3개월 동안에만 한정된다. 때문에 유권자들은 사실상 투표를 앞둔 시점에서 특정 후보가 선거비용으로 얼마를 썼는지도 알 수 없고, 그 후보가 지난 선거에서는 얼마나 썼는지를 알아보려 해도 그럴 수 없는 형편이다.
해외 각국에서는 유권자들이 보다 간편하게 각 후보의 선거비용과 정치자금 내역을 온라인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올해 2월 펴낸 ‘민주주의 비용’ 보고서에 따르면 비교 대상국 8개국 중 에스토니아, 캐나다, 멕시코, 영국, 미국 등은 각국의 선거비용을 온라인으로 확인할 수 있게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유권자들이 후보들의 선거비용을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문제 외에도 각 당 당원들도 당비 모금 및 지출 세부내역을 알 수 없는 등 정치자금에 대한 정보접근 면에서 미진한 부분이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에스토니아에서는 유권자는 물론 후보 측 회계책임자도 정치자금 내역을 보다 쉽게 인터넷에 업로드할 수 있도록 기계적으로 자동 판독이 가능한 회계보고서를 의무적으로 작성하고 공개하게 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미화 50달러가 넘는 정치기부금에 대해선 기부자의 정보까지 밝히게 되어 있다. 한국도 모든 정치자금의 수입과 지출을 회계책임자만이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된 예금계좌를 통해 실시하게 하는 제도적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에 따라 계좌의 입·출금 항목만 사용처에 따라 분류해 공개하면 되기 때문에 실시간 공개로의 전환도 쉬운 상황이다. 사실상 정치자금 실시간 공개를 의무화하기만 하면 유권자가 자금 내역을 더 쉽고 투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선거비용은 후보가 당선할 때나 낙선하더라도 득표율이 15%를 넘길 때는 전액을 보전받고, 10%만 넘기더라도 50%까지 보전받을 수 있다. 후보들이 쓰는 선거비용 중 상당 부분이 세금으로 지원되는 셈이다. 때문에 선거비용 실시간 공개는 들어가는 세금을 보다 투명하게 관리하는 데도 일조하는 셈이지만 아직 실시간 공개의 의무화는 갈 길이 먼 실정이다. 선관위의 한 관계자는 “이미 구축해둔 시스템이 있어 후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 문제 없이 운영되기 때문에 선관위에서도 선거 때마다 홍보에 애를 쓴다”면서도 “의무제로 법을 바꾸는 당사자가 의원들이다 보니 자신들의 자금 내역을 공개하는 데 미온적인 태도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