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주요 총기난사 사건과 보스턴 마라톤 테러 현장에서 찍힌 오열하는 여인 사진. 음모론은 동일한 여성이 동원돼 ‘연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모두 다른 여인으로 밝혀졌다. / 트위터
3월 22일,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테러와 같은 큰 사건은 많은 ‘이야기’를 남긴다. 그런데 이야기가 다 사실에 기반한 것은 아니다. 통계학자 네이트 실버의 표현을 빌리면 신호와 의미 없는 소음(noise)이 섞여 있다. 잡음에 불과한 소음들은 보통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잦아들게 마련이지만 오늘날의 양상은 상당히 다르다. 미국 보스턴 마라톤 테러. 3년 전 4월 15일 벌어진 사건이다. 체첸 출신의 두 형제가 밥솥 사제폭탄(IED)으로 일으킨 사건이라는 것이 미국 수사당국의 결론이었지만 음모론도 끊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음모론 중 하나가 crisis actor, 다시 말해 ‘재난사건 전문배우의 연기’라는 음모론이다. 지난해 10월 미국 오리건주 로즈버그 커뮤니티 칼리지 총기난사 사건 후 인터넷에 퍼진 사진이 대표적 사례다. 오열하고 있는 4명의 여성 사진이다. 이 여성이 보스턴 테러 현장,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오로라극장 총기난사 사건 사진에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혹도 있었다. 2013년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했다가 두 다리를 잃은 사람이 핼쑥한 얼굴로 휠체어를 타고 긴급 후송되는 장면은 이 사건을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이다. 그런데 그 사진 속 남자가 실은 닉 보그트라는 이름의 아프가니스탄 참전 군인이었고, 그가 사제폭탄으로 다리를 잃은 것은 2011년 11월이었기 때문에 보스턴 마라톤 폭발로 다친 것처럼 연기(acting)했다는 음모론이다. 실제 사진을 보면 보스턴 마라톤에서 다리를 다친 남자와 닉 보그트가 닮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재난전문 배우’로 발탁된 닉 보그트가 분장하고 현장에 나타났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이런 주장들은 사실일까. 먼저 닉 보그트. 인터넷 소문 검증 전문매체 ‘스놉스’에 따르면 이건 쉽게 규명된다. 보스턴 마라톤에서 다리 잃은 남자는 ‘제프 바우먼’임이 확인된다. 그리고 4명의 여인들. 사실 이런 소문의 검증은 쉽지 않다. 스놉스 측이 용케도 찾아낸 바에 따르면 샌디훅 사건 사진은 칼리 소토라는 여인이고, 보스턴 사진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오로라 총격사건 당시 찍힌 아만다 메덱이라는 여인이다. 로즈버그 사진의 주인공은 제시카 배즈퀴에즈라는 여성. 결국 입고 있는 옷, 머리 스타일, 피부색 내지는 인종적으로 ‘우연의 일치’가 빚어낸 착시다.
이 시점에서 떠오르는 것은 세월호 사건 때 박근혜 대통령이 안산 분향소에 조문 갔을 당시 ‘유족 연기자’로 지목됐던 할머니 논란이다. 과거 이 코너에서도 다룬 적(<주간경향> 1075호 언더그라운드.넷, ‘박근혜 대통령 조문 할머니 논란, 남은 뒷이야기’ 참조)이 있지만 안산 분향소 할머니와 엄마부대 회원 할머니, 대한노인회에서 악수를 거부당한 할머니 역시 파마 머리나 안경 등으로 인해 빚어진 ‘우연한 착시’일 뿐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런 걸 보면 전 세계를 도는 음모론에도 공통된 패턴이 있는 모양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