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발전 종교에서 떠나야만 한다. 발전 종교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수많은 전문가들(특히 경제전문가들)의 교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사고해야만 한다.
경제성장을 통한 빈곤의 퇴치와 복리의 증진을 약속하는 발전 패러다임은 유럽의 경험에 근거한 선형적 역사관과 진보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다른 지역의 국가들도 고유한 문화와 전통과 무관하게 유럽이나 미국의 산업화 과정을 따라잡아야 한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식민지의 자연자원과 노동력에 대한 불평등한 수탈에 기초했던 발전 패러다임은 중대한 결함을 드러냈다.
첫째는 빈곤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것이다. 자율적으로 조절되는 시장이라는 유토피아적 신화에 기초한 근대적 주류 경제관은 실제 시장에서 권력이 불평등하다는 것을 외면한다. 총량적인 GNP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배 시절에 형성된 왜곡된 분배구조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불평등이 개선되기보다는 악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불평등한 상황은 더 악화되어 중산층이 몰락하고 빈곤층이 확대되었다. 발전할수록 더 가난하게 된 것이다.
둘째, 농업, 특히 소농을 위축시키고 식량주권을 위협한다. 발전 패러다임은 공유자원인 토지를 상품화시키면서 소농보다는 상업농을 진작시키고, 농업보다는 공업을 중시한다. 또한 지역공동체의 식량 자급능력을 키우는 대신 지구적 범위에서 식량수급 시스템을 구축하도록 추동하면서 결국 농업을 자본의 통제 하에 두게 된다. 발전할수록 식량주권과 소농들의 삶은 위험에 내몰리게 된다.
셋째, 자연의 한계를 무시한 채 무한한 경제성장을 추구했던 발전 패러다임은 지구생태계가 감당할 수 있는 용량을 초과함으로써 기후변화와 같은 환경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발전할수록 생태적 조건은 더 나빠지게 되었다. 발전 패러다임의 이러한 결함은 지난 60여년간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에 걸쳐 현실화되었다.

제염 작업으로 거둬진 오염된 흙은 어디로 가는 걸까. 지난 2월 12일, 후쿠시마 토모이카의 임시야적장에 후쿠시마 원전 주위의 마을에서 거둬진 방사능에 오염된 흙 부대가 쌓여 있다. / 연합AFP
발전 패러다임의 확대, 종교로 믿어져
그러나 이러한 결함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발전 패러다임은 철회되지 않았고, 계속 확대되면서 재생산되었다. 그것은 발전이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발전경제학자 질베르 리스트는 발전 개념은 근대적 종교라고 주장한다. 그는 사회학자 에밀 뒤르케임의 종교에 대한 정의를 인용하였다. ‘종교란 하나의 사회집단이 공유하는 논박할 수 없는 특정 진실에 대한 믿음이며, 이 믿음은 의무적인 행위들을 규정함으로써 해당 집단의 사회적 결속을 강화한다’. 즉, 사람들은 기독교를 믿든, 불교를 믿든, 이슬람교를 믿든 상관없이, 발전이 우리를 더 잘살게 만들어줄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이데올로기와 달리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부정적 증거가 생긴다고 해서 믿음이 약화되지는 않는다.
발전 패러다임의 종교적 속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원자력에 대한 신뢰이다. 1955년 개최된 반둥회의는 미·소 냉전 구도 하에서 식민주의를 비판하고 제3세계의 독자적 발전에 대한 요구를 국제적으로 천명한 회의이며, 발전과 관련된 많은 국제기구들(UNDP, IAEA, OPEC 등)의 탄생에 기여한 회의다. 흥미로운 것은 이 회의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내용, 즉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이 주요 강대국들의 원자력 관련 기술과 훈련을 충분히 제공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비동맹 노선을 천명한 제3세계에서도 원자력은 발전의 상징으로 간주된 것이다. 실제로 1986년 체르노빌 사고가 있기 전까지 원자력 기술은 경제성장과 발전을 견인하는 기술로 간주되어 널리 확산되었다. 하지만 사고 이후에 잠시 주춤하다가 운전 중에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후변화 대응책으로서 다시 활황을 맞이하는 듯했다.
하지만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를 계기로 다시 원자력 기술에 대한 비판과 성찰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일본의 모든 원전이 적어도 3년간 작동을 중지했었으며, 중국도 원전 추가 건설 계획을 유보했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였다. 일본은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며 경기부양책들과 더불어 원전을 재가동시켰고, 중국도 원전 추가 건설을 재개했다. 한국은 사고가 난 바로 이웃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원전 추가 계획과 수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심지어 고리 원전의 온배수가 배출된 바닷물을 담수화하여 수돗물로 시민들에게 공급하겠다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사고 수습에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또 얼마나 많은 비용이 더 들지, 과연 수습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도 가늠하기 어려운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도 원자력에 대한 신뢰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노력은 필연
이것은 발전을 견인하는 기술로서 원자력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다. 물론 반핵운동도 존재하고, 탈핵을 주요 정책으로 삼는 정당(녹색당)도 등장하였으니 성찰과 비판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핵발전 추진집단의 이익추구라는 큰 설명 변수도 존재한다. 하지만 원자력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생각, 이웃 나라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원전 추가 건설에 대해 사회가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발전이라는 종교에 함몰된 증거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발전국가로 불리는 일본, 남한, 대만, 중국 모두 원전 신화에 포박되어 있고, 북한은 폭력적인 원자력 기술(핵무기)에 매달리고 있다. 열광적으로 발전 종교에 귀의한 결과는 결국 불확실성과 아무도 결과를 책임지지 못하는 위험사회로 돌아왔다.
우리를 더 절망스럽게 하는 것은 이 위험마저 사회·경제적 불평등 구조 속에서 불평등하게 배분된다는 사실이다. 위험 회피 능력에는 분명히 계급적 차별이 존재하는데, 발전의 결과 더 많은 계층이 위험에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도 부족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밀양 송전탑 사례에서 보듯이 소외된 지역들은 발전의 편익 대신 위험부담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야 한다.
이제 우리는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발전 종교에서 떠나야만 한다. 발전 종교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수많은 전문가들(특히 경제전문가들)의 교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사고해야만 한다. 칼 폴라니는 발전 종교가 전 세계적으로 득세할 무렵, 자기조정적 시장이라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의 전횡이 우리의 삶과 자연을 피폐하게 만들 것임을 지적하였고, 이에 대항하는 다양한 사회적 반발들(이중적 운동)이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었다.
흥미로운 것은 폴라니가 이러한 이중적 운동이 등장하는 메커니즘이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설명했다는 점이다. 인류가 자신의 삶을 개선시키려고 하는 노력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존재했던 인류의 필연이다. 그러나 발전은 인류의 필연이 아니다. 발전 종교가 초래한 위험사회를 목격하면서, 발전 종교에서 벗어나려는 이중적 운동들이 자연스럽게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자본과 상품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을 차지하는 사회관계를 회복하려는 다양한 공동체 운동들, 소농을 살리고 식량 주권을 회복하려는 로컬 푸드 운동, 탈핵운동, 마을만들기, 협동조합운동, 전환마을(transition town) 운동 등 다양한 이중적 운동들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통칭하여 ‘녹색전환’을 지향하는 운동들이 지향하는 목표지점과 청사진은 아직 구체적이지 않다. 혹자는 이러한 변화를 지속가능한 발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유엔에서는 올해부터 15년간 추구할 ‘지속가능 발전목표’(SDGs)를 제시하기도 하였지만, 발전 패러다임으로부터 벗어난 것인지 여전히 모호하고, 실효성이 있는 개념인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더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이 발전 종교에서 벗어나서 위험으로부터 해방되고, 안전하며 인간적인 동시에 생태적인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초대에 선뜻 응답하지 않고 우물쭈물할 시간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없어 보인다.
<이상헌(한신대학교 교수, 녹색전환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