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은 민주주의의 꽃이다. 본래 민주주의란 서로 다른 다양한 의견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펼쳐지고 조율되면서 합의를 도출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토론이다.
머지않아 막을 내릴 19대 국회의 결정적 한 장면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해 야당이 결행한 필리버스터, 즉 무제한 토론을 들 것이다. 192시간이라는 대장정을 기록한 필리버스터는 그동안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한국의 의회 민주주의의가 국민들에게 감동과 격정을 선사하며 무너진 자존심을 일시적으로나마 회복한 무대였다. 의회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졌던 역대 필리버스터는 대부분 소설책을 낭독하거나 심지어 요리 레시피까지 읽으며 그저 시간 끌기에만 주력했었다.
필리버스터 192시간, 공론화에는 모자라
반면 한국의 야당 의원들은 5시간에서 10시간에 이르는 그 긴 시간 동안 테러방지법의 문제점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집중해서 짜임새 있게 필리버스터를 이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의원 개개인의 능력이 검증되었고 개성 넘치는 캐릭터가 부각되었다. 누구는 웅변가로, 누구는 설교자로, 또 다른 누구는 강연자로 제각기 다른 캐릭터를 선보이며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서의 존재감을 뚜렷이 각인시켰다. 국민들 사이에 ‘마이 국회 텔레비전’이란 말이 등장하고, 국회방송이 개국 이래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였다. 필리버스터는 멋진 한 편의 드라마였고 의회 민주주의의 살아있는 교과서였다.

2월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렸던 ‘시민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테러방지법에 대해 성토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생각해 보면 국회의원 개개인의 목소리를 국민들이 이렇게 여과 없이 맘껏 접할 수 있는 기회도 필리버스터 이전에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동안은 기껏해야 몇십 초 남짓한 짧은 인터뷰 화면의 몇 마디나 의도적으로 편집된 뉴스 화면에 비춰진 단말마의 고함 소리 정도가 고작이었다. 방송사가 주관하는 TV 토론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도 늘 제한된 몇몇 국회의원들이 돌아가며 단골로 출연했을 뿐이었다. 국민의 대표로 뽑힌 국회의원 당사자가 민의의 전당이라는 의회 무대에서 한 발언보다는 종편 방송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자칭 전문가 혹은 평론가라는 사람들이 전하는 그다지 전문성 없는 만담 수준의 질 낮은 정치 평론이 국민들의 눈과 귀를 더 많이 장악하고 있었다. 얼마나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던가?
그러다 보니 테러방지법이라는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서도 대다수 국민들은 필리버스터가 전개된 긴박한 마지막 국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테러방지법이 처음 추진된 것은 미국의 9·11 테러 사건이 계기였으니 2001년의 일이다. 무려 16년 동안 정부와 의회에서 지속적으로 논의와 검토가 진행되었으나 국민의 기본권 보호라는 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계속 유보되었던 법안이었다. 이랬던 테러방지법이 국민들 사이의 제대로 된 공론화 과정도 거치지 않고 다수당의 일방적인 힘에 의해 신속하게 밀어붙이듯 처리되고 만 것이다. 결과적으로 192시간은 필리버스터를 이어가는 데는 경이로울 정도로 긴 시간이었지만 테러방지법에 대한 공론화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기도 했다.
토론은 민주주의의 꽃이다. 본래 민주주의란 서로 다른 다양한 의견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펼쳐지고 조율되면서 합의를 도출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토론이다. 물론 토론을 통해 모두가 늘 원만한 합의에 도달할 수는 없다. 만장일치란 정상적인 민주주의의 과정에서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채택한 문제 해결방안이 다수결의 원리이다. 의회 민주주의도 결국은 다수결의 원리에 입각해서 작동한다. 하지만 다수결의 원리조차도 정상적인 토론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의 횡포에 불과하다.
토론은 없고 정쟁만 난무한 20대 총선
테러방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과정이 정확히 여기에 해당한다. 오랜 기간 국회에서 유보되었던 테러방지법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느닷없이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고, 충분한 토론과 사회적 공론화의 과정을 생략한 채 덜컥 입법화되고 말았다. 그나마 야당의 필리버스터라는 무제한 토론이 있었지만 이것은 토론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저 입법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수단일 뿐이었다. 토론은 실종됐고 아울러 민주주의도 실종됐다. 19대 국회는 필리버스터라는 결정적 한 장면만을 남긴 채 토론의 실종과 민주주의의 실종이라는 참담한 막장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20대 국회를 맞이하기 위한 총선도 지금까지 정치권이 보여준 모습은 토론의 실종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총선이 불과 한 달 앞으로 성큼 다가왔지만 여당과 야당 어디에서도 정책을 둘러싼 쟁점과 토론은 보이지 않는다. 여당의 핵심 쟁점은 공천 과정에서 친박과 진박의 감별 여부이고, 야당의 핵심 쟁점은 야권 연대냐 제3 정당을 통한 양당 구조의 해체냐에 머물러 있다. 서민들은 살기 힘들어 죽겠다며 아우성이고 청년들은 헬조선에 대한 원성이 하늘을 치솟는데, 정작 총선을 준비하는 정치인들의 관심은 국민의 삶과 직결된 정책 현안보다는 자신들의 세력화를 위한 정치공학적 이해 다툼에만 쏠려 있는 것이다. 정책을 둘러싼 치열한 토론은 실종되고 오직 그들만의 정쟁만 난무한 가운데 20대 총선은 알맹이 없이 빈 깡통소리만 요란하게 울리며 4월 13일을 향해 치닫고 있다.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토론은 진작부터 시들해져 있다.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정책 토론회를 가보면 참석한 청중들의 수가 발표자와 토론자 수에도 못 미치는 민망한 경우가 많다. TV 방송 토론 프로그램의 시청률도 눈에 띄게 하락하는 추세이다. 토론이 시민들로부터 외면 받는 사양화된 상품 신세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온라인 공간에서 활발하게 이어졌던 네티즌들의 토론 문화도 이미 옛 이야기이다.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SNS 친구를 맺고 ‘좋아요’ 버튼을 서로 눌러주며 흐믓해 하거나 ‘오유(오늘의 유머)’나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 같은 끼리끼리 온라인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그들만의 댓글 놀이에 몰두하는 것이 고작이다. 혹시라도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이 보이면 즉각 친구 관계를 끊거나 커뮤니티에서 강퇴시키고 그 사실을 주변에 널리 알린다. 그러면 또 거기에 ‘좋아요’가 붙는다.
토론이 발붙일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토론의 실종과 함께 시민사회는 갈수록 점점 파편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민주주의의 후퇴다. 토론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집 나간 토론을 불러들여야 한다. 실종된 토론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야 진짜 민주주의다.
<민경배 경희사이버대학교 IT디자인융합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