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체로 자수성가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 상식이라면 상식인 데 비하여 한국은 자수성가보다는 그 반대의 시스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질주해 온 것이다.
올해 초 국내 주요 언론은 블룸버그통신사의 억만장자 인덱스 상의 ‘세계 400대 부자 분석’ 보도(2015년 12월 30일자)를 대대적으로 인용하였다. 400명 중 259명(65%)이 자수성가(self-made)한 사람들이고, 나머지가 상속(inherited)한 자산가라는 게 핵심이었다. 미국인(125명) 가운데 71%, 러시아 18명 전원, 일본 5명 모두, 중국 29명 가운데 28명, 인도 14명 중 9명이 자수성가형인 반면 우리나라는 5명 모두가 상속형 부자로 조사되었다.
그런데 현상만 언급할 뿐 그 원인과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은 기술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해결책은 없을까 하여 좀 더 살펴보았다. 200대 부자로 한정하여 살펴봤는데, 이는 샘플 수가 많고 적음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2016년 2월 16일 기준 200대 억만장자 데이터는 400대와 큰 차이가 없다. 미국 71명 중 50명이 자수성가형이다. 중국 15명, 러시아 14명, 일본 3명 모두가 자수성가형이다. 이탈리아 5명 중 4명, 인도 8명 중 6명, 홍콩 10명 중 6명, 프랑스 9명 중 5명, 독일 14명 중 5명, 영국 3명 중 1명이 자수성가형이다. 한국의 3명은 모두 상속형 부자였다.

한국의 부자들이 대부분 상속형일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재벌그룹의 경영권 세습관행이 더욱 일반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사진은 삼성가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고 이병철 회장의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 인근의 선영 입구.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세습자본주의로 전락하고 있는 한국
대체로 유럽지역은 상속형과 자수성가형 부자 수가 비슷하고, 미국과 아시아는 70%가 자수성가형이다. 그리고 산업화 역사가 오래된 유럽지역보다 신흥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수성가형이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미국, 일본, 이탈리아를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은 체제 전환국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 및 중국, 인도보다는 자본주의 역사가 더 길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역사가 짧은 국가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모두가 상속형 부자다. 이런 점에서 한국을 세습자본주의로 전락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한국 경제의 미래가 암울한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다.
즉, 길지 않은 자본주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역사가 훨씬 더 긴 미국, 일본은 물론 유럽국가보다 한국 경제의 역동성이 형편없이 낮은 것이 핵심이다. 글로벌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체로 자수성가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 상식이라면 상식인 데 비하여 한국은 자수성가보다는 그 반대의 시스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질주해 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 역사가 짧은 시장경제 국가이면서도 경제체질이 노쇠화되고 있으며, 따라서 현재 중장기 잠재성장률 전망치가 1%대로 추락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개인의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발전해 혁신적인 기술 및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함에도 이를 구조적으로 가로막는 경제·사회구조가 혁신적인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을 가진 사람들의 출현을 방해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가 야기된 다양한 원인과 해결책이 있을 수 있으나 여기서는 두 가지만 보고자 한다.
첫째, 가장 일반적으로는 정부가 재벌 중심 성장정책, 중장기 발전전략보다는 ‘747정책’과 같은 단기성장률에 매몰된 전략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제조업 중심의 사회로 편중되지 않게 서비스산업에도 충분한 전략을 세워야 하며, 동시에 제조업 내에서조차 이른바 주력산업 중심의 전략보다는 균형적인 산업발전을 위해 전략을 마련했어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주요 산업의 최종 먹이사슬 상층에 재벌·대기업들이 자리하고, 이들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불공정하고도 편법적이며 탈법적인 행위를 통해 자라나는 혁신주체들을 통제하고 장기성장의 싹을 잘라내고 있다. 재벌·대기업·원사업자들의 중소·벤처·수급사업자들에 대한 편법적인 기술탈취, 내부 경영자료 제공 요구,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이 통용되는 재벌경제체제가 지속되는 한 우리 경제는 미래가 없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경제민주화적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의 부자들이 대부분 상속형일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재벌그룹의 경영권 세습관행이 더욱 일반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재벌·대기업들의 소유·지배구조 세습체제가 가족기업 형태로 더욱 공고해졌기 때문이다. 필자가 2015년 작성한 재벌 경영세습에 대한 보고서를 보자.
우리나라 30대 그룹 총수 직계자손 가운데 승계기업에 입사한 3~4세 임원은 모두 44명이고, 이들 가운데 분석대상 33명은 평균 28세에 입사하여 3.5년 만인 31.5세에 임원직에 올랐다. 또한 20개 재벌그룹의 동일인(총수) 및 그 가족 107명의 승진연한을 분석한 경우를 살펴 보면, 이들이 입사 이후 임원이 되기까지의 기간은 평균 6.57년으로 분석되었다. 일반 대학졸업자 평직원이 대리-과장-차장-부장-임원까지 최소 평균 21년 소요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것으로 조사되었다. 반면, 이처럼 재벌가의 3~4세들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최고의 연봉과 기타 지대를 추구할 수 있는 평생직장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새로운 영역에서 진취적이고 독자적으로 실력을 배양하기보다는 적당히 유학 다녀오고 대부분 가업승계를 하거나 부모의 회사나 그 계열사에 들어가기를 선호한다. 특히 한국의 재벌 3~4세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것이 아니므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가문의 이익을 위한 기상천외한 방법
재벌과 대기업, 그리고 중소기업 등 부모로서 한평생 일궈온 사업체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고, 120% 인정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100보 양보해 투명한 경영과 정도경영, 현행법을 잘 준수하는 가운데 비전을 키워가는 가족기업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이나 미국 콕스 엔터프라이즈의 제임스 케네디가, 독일 폴크스바겐의 페르디난드 피에히,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도요타 아키오 사장 등의 경영철학을 모두 합친 한국의 가족기업 말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현장에서 충분히 지식을 쌓은 해당분야 전문가라는 것이다. 또한 창업자 후손이 간접적인 경영참여를 하는 경우에도 해당 가문 내에 엄격한 검증시스템을 작동시킨다. 즉, 단순히 창업자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회사의 지분율이 많다는 것만으로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경영능력에 대한 철저한 검증 이후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소유권은 가지고 있으나 경영에는 직접 간여하지 않고 있고, 이사회의 비집행이사나 감독이사회의 이사로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국내 재벌집단의 행동양식은 오로지 가문의 이익을 보존하기 위해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독립된 회사의 지분을 단 한 주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경영권을 행사하고 현장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현장 비전문가를 초고속 승진 시키는 것은 물론, 내외부의 충분한 검증 없이 허울뿐인 ‘경영수업’으로 경영 및 지배권을 세습시키고 있다. 현장과 전문적인 영역을 잘 알지 못하니 영세자영업자들이 영위하는 골목시장으로 진출하여 그곳마저 초토화시켜 배를 채운다. 나아가 대주주 및 총수 일가의 나쁜 경영행태를 견제하고자 도입된 사외이사들도 어찌된 일인지 한통속이 되어 총수 가문의 이익보호에 동원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결국,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드림’이 오늘의 세계 최강 미국을 탄생시킨 핵심이다.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경제적 제도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자수성가한 부호들의 비중이 높다는 결과는 이것이 또다시 경제적 유인구조가 되어 기업가정신을 가진 젊은 창업자들을 반복적으로 유인한다. 우리의 경우도 산업구조의 유연화 전략 구사, 경제적 강자의 갑질과 부정의한 행위에 대한 강한 통제, 재벌그룹의 경영권 세습에 대한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다. 이러한 정책은 장기적으로도 한국 경제와 사회의 펀더멘털을 강화하는 것이며, 자수성가한 부자들의 비중이 더 높아질 것이고, 이러한 노력들이 축적되면 성장률과 고용률은 저절로 상승하게 될 것이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