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한 레지던스 호텔 우편함.
미 샌프란시스코시가 얼마 전 미우정청(USPS)을 연방법원에 고소했다. 지자체가 연방정부기구를 상대로 정식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쟁점은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속속 들어서고 있는 레지던스 호텔(미국에선 이를 single-room-occupancy buildings, 줄여서 SRO라 부른다)에 대한 우편물 배달 문제다.
미 우정청은 올 1월부터 이 SRO에 가는 우편물 배달 방식을 개인별 배달에서 일괄 배달로 바꿨다. 우편물을 가구별로 구분된 우편함에 하나하나 투입하지 않고 한 자루에 몽땅 담아 로비나 프런트에 두고 가는 것이다. 자루에서 우편물을 꺼내 개인에게 전달하는 일은 건물내에서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배달서비스가 축소되자 여기저기서 원성이 나오기 시작했고 급기야 샌프란시스코시가 법적 대응에 나섰다. 레지던스 호텔 측 논리는 아파트와 배달 환경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아파트에선 우편함에 넣어주고 레지던스 호텔에선 자루째 놓고 가는 것은 부당한 차별이라는 것이다. 레지던스 호텔은 우리나라에서는 장기체류 외국인이 많이 이용하는 등 비교적 고급에 속하지만 미국에선 저소득층이나 장애인,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 사는 빈민 거주지다. 시 당국의 소송대리인인 데니스 헤레라 변호사는 “USPS가 힘 없는 이들이라고 만만하게 여겨 함부로 대우한다”고 주장했다.
샌프란시스코시는 우정청의 배달방식 변경으로 인해 우편물이 뜯겨져 나가거나 분실되는 사례가 빈발하면서 주민들의 건강과 안전에 큰 문제가 생겼다고 주장한다. 헤레라 변호사는 법원에 낸 16쪽짜리 소장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열거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레지던스에 사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4%, 3만여 명이다. 이중 C형 간염환자인 한 거주자는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 병원균에 감염되었다는 진단서를 한동안 받지 못했고, 말기암 진단을 받은 다른 거주자는 언제 치료받으러 오라는 병원의 통지문을 날짜가 지나서야 손에 넣었다. 둘 다 병원에서는 제때 보냈으나 집배원이 자루째 놓고 가는 바람에 개인에게 전달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레오라는 이름의 남자는 멀리 있는 어머니가 집세에 쓰라고 150달러의 머니 오더(우편환)를 보내줬으나 집배원이 우편물 자루를 건물 앞에 내려놓는 바람에 잃어버려 호텔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이 같은 배달사고는 당사자는 물론 시 당국에도 피해를 준다는 게 헤레라 변호사의 주장이다. 시가 의료·복지·방역·선거 등 공공 행정을 펼치면서 시민들과 소통하는 수단이 우편물인데, 우편물 배달에 문제가 생기면서 저소득층에 가는 생활지원금 등 복지서비스가 전달되지 않아 행정 차질이 빚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정청은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라는 입장이다. 노에미 루나 샌프란시스코 우체국장은 샌프란시스코시에 보낸 서한에서 ‘재정적자’ 때문에 SRO에 대한 개별 배달을 중단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해도 법적으로 문제없다는 법무부의 유권해석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느 쪽 주장이 정당한지는 법정에서 가려지게 됐다. 그러나 결과에 상관없이 소송 자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있다.
미국의 그것과 형태가 다소 다르긴 하지만 레지던스 호텔은 우리나라에서도 날로 번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 우편물 배달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확립된 규정이나 지침이 없다. 현재 규모가 크고 비싼 곳은 프런트에서 우편물을 한꺼번에 받아 개인에게 전달하고 있고, 규모가 작거나 영세한 곳은 개인수취함을 설치해 집배원이 일일이 투입하도록 하는 등 사정에 따라 다르다.
우편물은 표면에 기재된 주소, 그러니까 몇 동 몇 호까지 찾아서 배달하는 게 원칙이다. 이를 위해 3층 이상의 주택이나 사무소 건물에는 출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우편수취함을 설치해야 한다는 법 규정이 있다. 다만 기업체 사무실처럼 같은 건물 내 여러 수취인에게 전해지는 우편물은 관리인에 일괄 배달할 수 있다는 단서규정이 있다. 레지던스 호텔은 이중 어느 규정을 적용해야 하는지 모호하다. 혼선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방향을 정리해야 할 것 같다.
이종탁 <출판국 기획위원> jt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