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청계·광화문 광장… 촛불이 모여 거센 횃불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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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도심 속에 넓게 개방된 장소가 광장이다. 고대부터 광장은 종교·정치·사법의 중심지이자 시민의식의 발원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광장은 개방·소통의 장소이며, 집단 의사표시의 장소로 활용됐다. 5·16 쿠데타 군인들이 시청 앞에서 ‘시위’한 것이나, 6·10 항쟁 때 시청 앞에서 노제를 벌인 것, 2002 한·일 월드컵 시청 앞 응원 등이 그 사례들이다.

권위주의 시절 위정자들은 광장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시청 앞에 일부러 차도와 분수대를 만들어 광장의 기능을 축소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 탈권위주의 시대를 거치며 서울 도심에 크고 작은 광장이 들어섰다. 서울광장은 2004년 5월 기존 시청 앞 분수를 없애고 차선을 폐지해 만들었다. 면적은 1만3200㎡나 된다. 청계광장은 2005년 3월 청계천을 인공으로 복원하면서 만든 폭 22m, 길이 77m 정도의 조그만 광장이다. 광화문 광장은 2009년 8월 광화문에서 세종대로 4거리까지 왕복 16차선을 10차선으로 줄이고 조성한 폭 34m, 길이 557m의 도심 중앙광장이다.

2008년 촛불시위 발원지인 청계광장에서는 지금도 촛불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10월 22일 청계광장에서 ‘한국사 국정화 중단·노동개악 저지’ 촛불집회가 열렸다.

2008년 촛불시위 발원지인 청계광장에서는 지금도 촛불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10월 22일 청계광장에서 ‘한국사 국정화 중단·노동개악 저지’ 촛불집회가 열렸다.

자신이 복원한 광장에서 비난 받은 MB
서울 도심에 만들어진 광장 중에서 특히 청계광장은 의미가 깊다. 청계광장을 만든 사람은 이명박(MB) 당시 서울시장이다. MB는 청계천 복원(사실은 인공조성)이라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지명도를 높이고 이것을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MB가 세운 장학재단도 ‘청계재단’이라고 할 정도로 청계천과 MB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렇게 만든 청계광장이 MB 자신을 옥죈 ‘현장’이 된 것도 아이러니다.

2008년 2월 25일 MB정부가 출범했다. 큰 득표 차이로 정권교체에 성공한 MB정부는 자신감이 넘쳤다. 취임하자마자 곧장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정상회담 전날인 4월 18일 MB는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 타결을 발표했다. MB는 “도시 근로자들이 질 좋은 고기를 싼값에 먹게 됐다”고 발언했다.

CEO 리더십을 통해 ‘모두 잘살게 해주겠다’는 어젠다로 대통령에 당선된 MB는 취임 초부터 한반도 대운하, 영어몰입교육, 의료민영화 등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쏟아냈다. 질주하는 MB의 정책에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이 ‘검역을 포기한 미국산 수입소’에서 폭발했다. 4월 29일 MBC 은 광우병 ‘다우너 소(쓰러지는 소)’의 진상을 추적한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를 방송했다.

국민들은 검역주권을 포기한 MB정부에 분노했다. MB 정책에 의문을 가진 ‘안티 이명박’ 카페 회원들이 5월 2일 서울 청계광장에 모이기로 했다. 이들은 과거 매번 시위를 주도했던 정당·시민·사회단체도 아니었다. 이름도 ‘촛불문화제’여서 경찰도 300명 정도 모이는 소규모 집회일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촛불문화제에는 예상 밖으로 1만5000명이나 모였다. 과거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효순·미선양 추모, 2004년 노무현 탄핵 반대시위에 등장했던 촛불이지만 이번처럼 촛불이 많이 등장한 전례가 없었다. 시위 참여자는 좁은 청계광장을 넘어 청계천로 양측을 메우고, 무교동 모전교를 넘어 멀리 을지로 광통교까지 이어졌다.

이날 시위는 인터넷 온라인 상에서 활동하던 카페가 오프라인에서 위력을 보인 일대 ‘사건’이었다. 이날 참석자의 절반가량은 중·고생들로, 이들은 SNS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고 방과후 교복을 입고 참석했다. 이들은 당당히 “아직 나이도 어린데 꿈도 못 이루고 광우병으로 죽는 게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청계광장에서 시작된 이날 촛불문화제는 촛불시위, 즉 야간시위로 이어졌지만 평화적으로 끝났다.

오프라인 상의 광장 촛불시위뿐만이 아니었다. 온라인 아고라(광장)에 개설된 이슈청원 코너의 ‘미 쇠고기 졸속협상 무효화 특별법 제정 촉구’ 청원에는 17만명이 넘게 참여했다. 이들의 요구는 점차 정치성을 띠더니 ‘MB OUT’ 구호로 이어지고, MB 탄핵 청원 서명자는 100만명이 넘었다.

2008년 6월 10일 세종로 4거리에 거대한 컨테이너를 2층으로 쌓은 ‘명박산성’이 등장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8년 6월 10일 세종로 4거리에 거대한 컨테이너를 2층으로 쌓은 ‘명박산성’이 등장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8년 5월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가 벌어진 청계광장. 이 광장은 바로 이명박 서울시장이 조성한 것이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8년 5월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가 벌어진 청계광장. 이 광장은 바로 이명박 서울시장이 조성한 것이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쇠고기 수입반대에서 MB 탄핵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에서 시작된 촛불시위는 점차 MB정부 반대로 이어졌다. 정부는 일몰 후에는 시위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집시법(제10조) 규정을 적용해 촛불시위자를 사법처리하겠다고 나섰다. 서울시교육청은 현장지도를 통해 중·고생들의 촛불시위 참여를 막으려 했지만 막지 못했다. 정부는 “광우병 운운은 근거 없는 괴담”이라며 “재협상은 없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촛불시위는 이제 시작이었다. 청계광장에서 시작된 촛불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온·오프를 망라해 ‘광장’은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정치의 장이 됐다. 5월 6일에는 1000여개 인터넷 카페, 정당·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해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보다 조직적으로 “쇠고기 협상의 진실을 밝히고 재협상을 하라”고 요구했다.

자신감 넘치게 막 출범한 MB정부는 당황했다. 결국 5월 22일 MB는 국민께 드리는 담화문을 통해 “무엇보다 제가 심혈을 기울여 복원한 바로 그 청계광장에서 어린 학생들까지 나와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아팠다”면서 “정부가 충분한 이해를 구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노력이 부족했고, 국민 마음을 헤아리는 데 소홀했다는 지적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사과했다.

하지만 촛불 민심은 MB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 24일 청계광장에서 촛불집회는 청와대 쪽으로 향했다. 경찰은 처음으로 살수차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하고 촛불시위자들을 연행했다. 하지만 일부 촛불시위자들은 경찰의 연행을 ‘닭장 투어’라고 조롱했다. 시위는 밤새 이어지고 흥분한 촛불시위자들은 ‘쇠고기 재협상’ 요구 대신 정권 퇴진을 요구하게 됐다.

드디어 6월 10일 오후 7시 ‘6·10항쟁 21주년’을 맞아 전국에서 대규모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촛불시위대와 경찰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급기야 경찰은 세종로 4거리와 안국로 등 청와대로 향하는 길목에 모두 60여대의 컨테이너를 2층으로 쌓아 바리케이드를 쳤다. 이것이 바로 ‘명박산성’이다. 특이한 모습의 명박산성은 <파이낸셜타임스> <뉴욕타임스> 등에 소개되면서 세계적 조롱을 받았다. 명박산성은 개방과 소통의 SNS를 통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촛불시위자에 맞선 MB정부의 ‘불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오래 기억됐다.

‘6·10 백만 대행진’에는 서울에서만 50만명, 전국적으로 100만명이 넘는 촛불시위자가 참여했다. 결국 한승수 국무총리를 비롯한 MB 내각이 이날 쇠고기 파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일괄사퇴했다. 6월 19일 MB는 다시 “청와대 뒷산에 올라 이어진 촛불을 바라봤다.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다”고 국민에게 사과했다.

명박산성은 나중에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에 보장된 행동자유권 침해’라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받았다. 또 헌재는 2014년 3월 27일 해가 진 이후 야간집회를 금지한 집시법 제10조에 대해 ‘집회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촛불시위를 막았던 MB정부의 공권력인 집시법과 명박산성의 정당성이 모두 무너진 것이다.

광화문 광장 혹은 ‘세월호 광장’으로 변한 세종로 4거리. 세월호 희생자 유족의 농성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여전히 경찰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다.

광화문 광장 혹은 ‘세월호 광장’으로 변한 세종로 4거리. 세월호 희생자 유족의 농성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여전히 경찰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다.

“촛불집회는 민주주의 구원투수 역할”
촛불시위 65일째인 7월 5일 전국에서 53만명(경찰추산 6만8000명)이 참여해 ‘7·5 국민승리선언 범국민 촛불 대행진’을 열고 스스로 촛불시위를 마무리했다.
2008년 촛불시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는 “촛불집회는 민주주의 제도들이 작동하지 않고,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허약할 때 그 자리를 대신할 일종의 구원투수 같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남주 성공회 교수는 “촛불집회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위기가 뚜렷해지는 상황에서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 모색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경향신문>과 참여사회연구소 등이 공동 주최한 ‘촛불집회와 한국 민주주의’ 시국 대토론회. 2008. 6. 16)

하지만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다’던 MB정부는 결국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했다. ‘국민의 의견을 소중히 듣겠다’던 MB정부는 촛불시위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을 가했다. 광우병 문제를 보도한 언론사 기자와 PD 상당수가 해직됐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찬성하는 보수언론에 대한 광고주 압박운동을 벌이던 네티즌은 사법처리 대상이 됐다. 위헌 판정을 받은 명박산성은 경찰버스로 진화했다.

그렇다면 시민의 자발적인 소통으로 타올랐던 2008년 촛불시위는 실패한 것인가. 청계광장에서는 지금도 촛불이 켜지고 있다. 올 10월 초부터 청계광장 초입(파이낸스빌딩)에서는 매일 저녁 7시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 켜졌다. 이번에는 ‘노동개악 저지 촛불집회’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항의집회다. 여기에 최근에는 하나의 이슈가 더해졌다. 바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중단 촉구 촛불집회’다.

촛불집회를 막기 위해 둘러 쌓은 명박산성이 있던 광화문 광장은 ‘아직은 세월호 속에 가족이 남아 있습니다’라는 플래카드와 함께 ‘0416 전시관’ ‘광화문 분향소’ 등이 들어서 있다. 시민·사회단체는 이곳을 아예 ‘세월호 광장’으로 이름을 바꿔 부른다. 지금도 세월호 희생자를 기억하는 미사가 300일 넘게 이어지고 있다.

7년 전 전국을 뒤흔들었던 촛불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현실은 불행이자, 또 역설적으로 ‘반가움’이다. 불행이란 MB정권의 오만과 불통이 박근혜 정부에서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반가움이란 어두운 상황에서도 빛을 밝히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촛불시위의 성패를 결론 내리기는 아직 이르다.

<글/원희복 선임기자·사진/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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