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튀’라는 속어는 적어도 인터넷 국어사전에도 나올 만큼 어지간히 통용되는 낱말이 됐다. 당사자야 통쾌하겠지만 당하는 사람은 씁쓸하다 못해 괘씸하기까지 하다.
지난달 결함 자동차의 교환, 환불을 의무화하는 제도(일명 ‘한국판 레몬법’) 관련 기사를 취재하던 중 먹튀를 당했다. 계속된 수리와 고장에 지친 소비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한국자동차소비자연맹의 도움으로 며칠 만에 고르고 골라서 경기 의정부에 사는 한 남성을 소개 받았다. 그는 국내 완성차 업체(업체명은 먹튀 취재원을 배려해 밝히지 않겠다)의 스포츠유틸리티차(SUV)를 샀으나 주행거리가 겨우 700㎞ 남짓 상태에서 갑자기 시동이 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엔진을 통째로 갈았지만, 밸브와 오일팬이 다시 말썽을 부렸다. 그는 “이제 수리라면 지긋지긋하다”고 치를 떨며 취재기자에게 하소연했다. 그의 사연을 녹인 기사를 다 써놓고 마감을 불과 1시간 남겨둔 때였다. 불현듯 휴대전화에 문자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자동차회사) 본부장과 면담 중이다. 결과를 보고 나중에 연락을 드리겠다…’. 이런 경우는 십중팔구 ‘먹튀’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로 어떤 연락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따져묻고 싶었지만 참는다. 수년 전에도 전자제품 결함 기사를 쓰자 어떤 제보자가 연락을 해왔다. 기업 오너 관련 중요 제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도 수차례 메일을 주고받다가 연락을 두절했다. 짐작컨대 <경향신문> 취재를 미끼로 걸고 사주 측에 접근했을 것이다. 대게 이런 먹튀 취재원은 애초에 한몫 챙길 요량으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다. 십중팔구는 이런 식이다. ‘지금 소비자시민단체는 물론 기자와도 접촉했다. 나랑 합의를 할래, 아니면 기사로 공개 창피를 당할래?’
주선을 해준 이정주 자동차소비자연맹 회장은 “또 한 건 있었군”이라며 별로 놀라는 반응도 아니었다. 대체로 업체 측이 전향적 태도로 교환이나 환불을 해주는 전제조건은 ‘언론과의 접촉을 피할 것’ 정도다. 자기 하나 살겠다고 신의를 저버리며 구조적 모순은 나 몰라라 하는 행동이다.
미국의 레몬법 같은 장치가 없다 보니 소비자(다윗)가 거대 기업(골리앗)과 개별로 실랑이해야 하는 현실이 이기적 소비자를 낳고 있다. 제도적 미비점이 소비자들을 미꾸라지처럼 만든 꼴이 아니고 뭔가. 그럼에도 서운함은 영 가시질 않는다.
<전병역 기자 junb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