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해클럽>-고통에 대한 위로가 아닌 ‘고통의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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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해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주인공, 그 주인공에게 클럽에 가입해 자해를 공유하자는 인물들. 여고생들은 현실과 이격된 곳에서 자신에게 상처를 내고, 고통을 공유한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던 왕따 아영이는 커터칼을 들어 손목을 그었다. 흑백의 거친 선 위로 붉은 피가 흘렀다. 아영이 ‘지금이라면 / 어쩌면 / 죽을 수 있을지도…’라고 생각하는 순간 반에서 제일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 지수가 빈 교실에 들어선다. 어찌할지 모르던 아영에게 지수가 다가서 묻는다. “너, 자해하니?” 지수의 난데없는 질문이 황망하다. 하지만 아영을 당황하게 만드는 건 누군가가 자신에게 거는 대화다. 왕따 아영에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적이 없으니까. 지수는 당황하는 아영의 손을, 그러니까 자해해 흘리는 피를 감추는 손을 잡아주며 말한다. “너무 당황하지마. / 난 최초 목격자로서 너에게 제안할게. / 우리 클럽에 들어오지 않을래?”

클로즈업으로 잡혔던 칸은 큼지막하게 확대되고, 쇼트도 풀쇼트로 확장된다. 결정적으로 마치 노을빛이 물든 것처럼 흑백의 세상에 새로운 빛이 내려선다. 고통받고 있는, 그래서 자해를 통해 스스로를 학대하던 아영에게 지수가 다가온 이 상징적인 장면을 작가는 한 칸 안에 ‘두 사람’을 넣어, 흑백에 색을 넣어, 클로즈업을 풀쇼트로 바꿔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 아영의 내레이션이 깔린다. ‘그 때, 내 피가 / 지수의 손까지 한가득 스며들었다.’

소망 작가의 만화 <자해클럽>

소망 작가의 만화 <자해클럽>

‘고통이 위로에게’ 값싼 위로와의 이별
이 프롤로그는 <자해클럽>이 진행되는 서사의 모든 것을 담은 한 편의 시다. ‘자해클럽’이라는 고통을 구체화하는 비밀스러운 결사에 들어오라는 제안은 막연한 위로가 아니라 위로보다 소중한 고통이다. 나의 부박한 언어를 치우고, 시인의 언어를 빌려온다. 정호승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를 ‘고통이 위로에게’로 바꾸어 본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고통을 주겠다.
위로보다 소중한 고통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고통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위로를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고통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고통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고통까지 걸어가겠다.

독자들은 아영이 지수라는 구원자를 만나 위로받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프롤로그에서 보여준 것처럼 지수의 제안은 ‘자해클럽’에 가입하라는 것이지, 친구가 되겠다는 건 아니다. 자해클럽에 가입하는 건 고통에 대한 위로가 아니라 나누는 고통의 제안이다. 아영이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 클럽을 통해 ‘연대하는 고통’을 제안한 것이다. 지수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영은 자해클럽에 가입한다.

아영은 지수의 제안을 위로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지수는 고통을 나누는 자로 연대할 뿐 아영을 위로하지 않는다. 고통의 연대로 들어선 아영은 때론 지수에게 절망하지만, 지수는 값싼 위로를 주지 않는다. 지수가 선택한 값싼 위로와의 이별이 <자해클럽>이 지닌 최대 장점이다.

웹툰 플랫폼 레진에는 고통의 연대를 통해 독자를 위로하는 ‘위로 3부작’이 있다. 두 편은 이미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다. 어머니와 딸의 삶을 규정하는 가난을 그린 휘이 <숨비소리>, 가족의 차별이 주는 상처를 그린 단지 <단지>, 그리고 마지막 한 편이 소망의 <자해클럽>이다. 레진이라는 플랫폼의 가치는 이런 작품들을 발견하고, 연재하는 안목이다. 공교롭게 이 3부작은 모두 여성이 주인공이다. 고통받은 여성을 대중서사에 담아내는 건 신파의 유구한 전통이다. 신파는 고통받는 여성을 통해 카타르시스에 도달한다. 신파에서 묘사하는 그녀들의 고통은 극복을 전제로 한 고통이거나, 아니면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이다. 극복이건, 숙명이건 마지막 울음으로 카타르시스를 가져오고 그걸로 끝. 현실로 돌아오면 여전히 시궁창, 요즘 말로 ‘헬조선’이다.

소망 작가의 <자해클럽>

소망 작가의 <자해클럽>

벼랑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사는 시대
‘위로 3부작’은 섣부르게 극복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 속의 진짜 고통을 말한다. <자해클럽>의 왕따 아영이가 지수에게 위로와 구원을 갈구하지만, 지수는 다가오면 차갑게 돌아선다. 이 낯선 이물감은 독자들을 당황시키기도 하지만, 그동안 애써 외면했던 우리의 고통을 바라보게 한다.

‘자해하는 여고생’에 대한 만화라고 하면, 자칫 선정적인 소재의 만화라 생각될 수 있다. 작품의 머리에 “작품의 의도 역시 자해와 폭행에 대해 방조하지 말고 경각심을 갖자는 의미로 해석”되기 바란다는 불필요한 설명을 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충격적인 소재‘만’을 바라보면, 이 만화의 가치에 도달할 수 없다. 자해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주인공, 그 주인공에게 클럽에 가입해 자해를 공유하자는 인물들. 작가는 의도적으로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교복인 ‘세라복’을 입은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세라복 여고생들은 현실과 이격된 곳에서 자신에게 상처를 내고, 고통을 공유한다. 아영이 <자해클럽>의 다른 주인공들과 고통을 공유하는 것과 동시에 독자도 그 고통을 공유한다. 많은 독자들이 아영이 들려주는 1인칭의 고백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검정 레터박스에 새긴 선명한 명조체의 무게만큼이나 강렬하다. 우리 시대의 평범한 이들은 모두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아 있다. 우리 시대는 <자해클럽>의 학교보다 더 처절하게, 우리를 몰아간다. 벼랑 끝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마치 비통의 숨을 토해내듯 말한다. “살아남았구나, 나. 겨우겨우 살아남았구나. 오늘도, 살아남았어.”(<자해클럽> 12화 중 아영의 내레이션)

이런 무거운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자해클럽>은 감성의 흐름을 중심으로 서사를 끌어간다. 능숙하게 웹툰의 스크롤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작화 밀도도 조율한다. 특히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에서 작가는 섬세하게 빗금을 넣는다. 작가가 시간과 노동을 투자해 넣은 빗금은 독자의 손과 시선을 멈추게 한다. 마치 물 흐르듯 춤을 추는 감성은 내레이션을 타고, 강렬한 빗금을 지나 독자에게 다가온다.

그렇게 다가와 우리 시대 고통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심한 나의 위로를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세상의 고통들을 가리던 함박눈을 멈춘다. 고통의 발견은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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