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같은 아버지들은 환생하여 오늘도 ‘나는 이렇게 살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사니?’ 못마땅해 하며 ‘공부와 예법’을 강조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였다. 평생 ‘한시라도 공부를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며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았던 아버지에 비해 아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강아지 그림이나 그리며 밖에서 노느라 얼굴이 늘 새까매져 있었다. 게다가 대님조차 제대로 매지 못하는 ‘예법도 모르는’ 아들이 영 못마땅했다. 대리청정을 통해 아들에게 권력을 쥐어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하는 일마다 아버지가 만든 질서에 대한 도전이요, 반역이었다. 허공을 나는 화살이 떳떳할지 몰라도, 과녁에 꽂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법. 그건 ‘아버지의 나라’를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었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을 뒤주에 가둔 후 쇠못을 박았다. “너는 존재 자체가 역모다!” 영조(송강호)와 사도세자(유아인)의 비극을 다룬 영화 <사도> 이야기다.
영화 <암살>에서 강인구(이경영)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딸을 “모르는 년”이라며 가차 없이 죽였다.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을 비롯한 일제강점기의 자식들도 결국 죽거나, 미쳐버렸다. 아버지는 자식을 죽였지만, 자식은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다. 사도세자는 칼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그가 쥔 칼끝에는 아버지의 피 대신 눈물이 흘렀다. 그는 끝내 돌아섰고 결과는 죽음이었다. 안옥윤(전지현)은 아버지를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는 그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아버렸다. 결국, 아버지는 제3자가 죽였다. 하와이 피스톨 또한 (친일한) 아버지를 죽일 수 없어 친구들과 서로의 아버지를 죽여주기로 한 ‘살부계(殺父契)’를 조직하지만 결국 그로 인해 죽거나, 미치거나, 반사회적 인물이 되었다. 어쩌면 역사는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 자식, 자식을 죽이는 아버지’ 관계의 비극적 반복일지도 모르겠다.
‘현대판 뒤주’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가로 1.1m, 세로 0.8m 정도, 사람 한 명이 딱 들어갈 ‘스터디 룸’이다. 공부에 방해되는 요소를 차단해 집중력을 높이고, 때에 따라서는 문에 잠금장치를 달거나 소리가 나는 종을 달아 감시하는 기능도 있는데, 강남에서는 날개 돋친 듯 팔린다고 한다. 그렇게 감금된 자식들은 자라서 무엇이 될까? 영조와 같은 아버지들은 환생하여 오늘도 ‘나는 이렇게 살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사니?’ 못마땅해 하며 ‘공부와 예법’을 강조한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강조했던 ‘공부와 예법’을 요즘 개념으로 바꾼다면 ‘노오력과 싸가지’가 될 것이다. 너는 왜 노오력을 안 하니? 너는 왜 그렇게 싸가지가 없니? 도대체 어쩌려고 막살고 그러니?
우리가 ‘일못’이 되어 허공을 떠도는 것도 ‘아버지의 기준’에서 보자면 기가 막힐 노릇이리라. “우리가 어떻게 노력하여 이룬 나라인데!” 그렇기에 자식들은 늘 불완전하고 미덥지 못한 존재다. 대리청정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려야 한다. 이 숨 막히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자식들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순응하거나, 미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다. 차마 아버지를 죽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 아버지를 죽이면 자자손손 ‘패륜’으로 기억되지만, 아들을 죽인 아버지를 명명하는 단어는 없다.
<사도>에서 아버지는 ‘내가 왜 너를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장황하게 늘어놓은 후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고 개선가를 올리며 엎드린 아들의 환영을 넘어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이 장면에서 깊은 슬픔과 절망을 느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정확하게 은유하는 풍경 아니던가. 자식이 병들건, 죽어 나가건 세상은 망하지 않고 아버지의 나라는 굳건하다. 나는 이 시대를 ‘(상징적) 아버지와 절연하거나 죽여야 사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식들은 사도세자처럼 미치광이가 되거나, 견고한 시스템에 의해 살해당할 것이다. 아버지를 극복하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내는 ‘고아들의 연대’가 가능할 때에야 우리는 내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암살>에서 친일 청산을 못한 이유는 아버지(강인구/염석진)를 죽이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렇게 이어 내려오는 ‘아버지의 나라’는 자식들을 또다시 ‘뒤주’에 가두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할 ‘사(思)’, 슬퍼할 ‘도(悼)’는 아버지의 몫이 아니라 자식들의 몫이다.
<오수경 일 못하는 사람들 유니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