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어뷰징보다 더 고약한 정책 어뷰징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이 정부와 대기업 눈치 안보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거침없이 내고 있는 소규모 독립 언론, 대안 언론들의 생명줄을 압박하려는 속셈이 반영된 것이라면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사태라 하겠다.

인터넷 신문 <슬로우뉴스>는 작지만 강한 매체다. 흥미 위주의 가볍고 휘발성이 큰 정보만 나날이 늘어나는 인터넷 환경 속에서 깊이 있고 묵직한 담론들만 뚝심 있게 고집하는 이 매체는 열혈 구독자층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이 보석 같은 매체가 머지않아 인터넷 신문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상실하게 될 것 같다. 바로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 때문이다. 여성주의 전문 매체 <일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무려 12년이란 긴 세월 동안 여성주의 한 길만을 꿋꿋하게 걸어왔던 이 소중한 매체 역시 조만간 인터넷 신문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워 보인다. 바로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입법예고한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에 따르면 인터넷 신문의 등록 요건 중 현행 3인 이상으로 되어 있던 취재 및 편집 인력이 5인 이상으로 강화된다. 즉 5인 미만의 상근 인력을 두고 있는 인터넷 신문들은 1년의 유예기간이 지나면 모두 등록이 취소되는 것이다. 한국인터넷기자협회가 추산해보니 대략 85%의 인터넷 신문이 퇴출될 것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가히 인터넷 신문에 대한 대학살이라 부를 만한 수준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입법예고한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에 따르면 <슬로우뉴스>나 <일다>와 같은 양질의 기사를 생산해온 군소 인터넷매체가 등록 취소되게 된다. 사진은 <슬로우뉴스>

문화체육관광부가 입법예고한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에 따르면 <슬로우뉴스>나 <일다>와 같은 양질의 기사를 생산해온 군소 인터넷매체가 등록 취소되게 된다. 사진은 <슬로우뉴스>

군소 인터넷 신문 상당수 어뷰징과 무관
정부가 신문법 시행령을 예고한 명분은 기사 어뷰징 및 유사언론행위 방지와 인터넷 신문의 품질 향상이다. 즉 군소 인터넷 신문들이 어뷰징 기사를 포털뉴스에 송출해 클릭률을 높이고, 기업에 부정적인 기사를 작성해 광고나 협찬을 요구하는 유사언론행위를 일삼는 장본인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사실 포털뉴스 화면을 통한 기사 어뷰징은 아주 심각한 수준이다. ‘충격!’, ‘경악!’, ‘알고 보니…’ 등 이용자들의 호기심을 부추기는 자극적인 제목에 낚여 클릭했다가 별 내용도 없는 중복 기사에 허탈감을 느낀 기억 한두 번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유사언론행위로 인한 피해 역시 갈수록 늘고 있다. 최근 한국광고주협회가 기업의 광고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유사언론행위 피해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 기업 중 86.4%가 유사언론행위로 인한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또 이런 언론사들에게 광고 집행을 했다고 응답한 광고주가 97.6%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사언론행위란 점잖은 말 대신 ‘사이비 언론’, ‘깡패 언론’이란 말을 붙여도 시원치 않을 일이다. 이런 매체들은 단호하게 언론시장에서 퇴출시켜야 마땅하다. 신문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바로 이런 효과를 거두도록 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다.

그런데 문제는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이 겨냥하고 있는 5인 미만의 군소 인터넷 신문 상당수는 기사 어뷰징이나 유사언론행위와 별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위에 소개한<슬로우뉴스>는 포털에 기사 송출을 하고 있지 않다. 구독자들이 <슬로우뉴스>를 접하는 경로는 웹사이트에 직접 접속하거나 SNS에 올라오는 기사 링크를 통해서다. 포털 뉴스 화면에서 기사 어뷰징으로 클릭을 유도할 수 있는 수단 자체가 없다. <일다>는 창간 이후 12년 동안 광고 게재 없이 오직 독자들의 자발적 후원금만으로 명맥을 유지해 온 매체다. 기업 광고를 따내기 위한 유사언론행위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곳이다. 퇴출이 예상되는 85%의 인터넷 신문 중 상당수가 바로 이러한 매체들이다.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이 엉뚱하게도 기사 어뷰징을 양산할 인력규모도, 기업을 대상으로 유사언론행위를 자행할 만한 힘도 갖고 있지 않은 군소 인터넷 신문사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저널 <일다>

여성주의저널 <일다>

언론사 규모가 크다고 기사 품질이 좋은가
오히려 기사 어뷰징과 유사언론행위는 중대형 규모의 매체들로부터 많이 나타난다. 근거 자료도 이미 여럿 나왔다. 지난 4월 한국방송학회가 개최한 춘계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연구논문에 따르면 기사 어뷰징을 가장 많이 한 1~10위까지의 언론이 모두 지명도가 높은 중대형 신문사였다. 작년 한 해 동안 언론중재위원회에 조정중재 신청이 가장 많았던 인터넷 신문들의 목록을 봐도 상위 16개가 모두 중대형 신문사였다. 심지어 정부가 이번 개정안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근거로 삼고 있는 한국광고주협회의 ‘유사언론행위 피해실태조사’ 보고서가 지목한 인터넷 신문사들 가운데 취재인력이 5인 미만인 언론사는 단 한 개도 없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85%의 군소 인터넷 신문들을 퇴출시킨다고 해서 어뷰징과 유사언론행위가 줄어들 리 만무하다. 문제를 일으키는 언론사들은 버젓이 따로 있는데 애꿎은 군소 인터넷 신문들만 날벼락을 맞게 된 셈이다.

따지고 보면 기사의 품질이 언론사의 크기로부터 비롯된다는 정부의 규모 중심적 사고방식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다. 1인 미디어 시대가 시작된 지 오래다. 유명 신문사에 몸담고 있던 세계적인 저널리스트들이 소속사를 박차고 나와 1인 미디어에 뛰어들었다는 소식은 이제 더 이상 신선한 뉴스도 아니다. 미국 정부는 이미 10년 전부터 1인 미디어 운영자에게 백악관 출입 기자증을 배부하고 있다. 국내 군소 인터넷 신문들도 비록 상근 인력은 소수지만 분야별 전문가 및 파워블로거들과 폭넓게 필진 네트워크를 구축해 양질의 기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세상은 벌써 이렇게 많이 바뀌었는데 정부의 발상은 여전히 시대의 흐름과 언론환경의 변화를 거스르고 있다.

주먹구구식 입법절차도 개탄스러운 일이다. 최소한의 근거자료도 없이 그저 군소 인터넷 신문들이 어뷰징과 유사언론행위의 주범일 것이라는 선입견과 주관적 판단만을 가지고 버젓이 입법예고까지 할 수 있는 정부의 무지막지한 배짱이야말로 ‘충격!’ 그 자체다. 인터넷 언론 장악이라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는지도 의심해볼 만한 일이다. 정부와 대기업 눈치 안보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거침없이 내고 있는 소규모 독립언론, 대안 언론들의 생명줄을 압박하려는 속셈이 이번 개정안에 반영된 것이라면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사태라 하겠다.

정부가 이런 터무니없는 개정안이나 만들고 있는 사이에 ‘알고 보니’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한 국가별 언론자유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3년 연속 하락해 60위까지 떨어져버렸다. 그러니 확실하게 짚고 가자. 낚시성 제목으로 클릭을 유도하는 기사 어뷰징보다 더 큰 해악은 아무 근거자료도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입법을 양산하는 정책 어뷰징이다. 광고 유치를 목적으로 기업을 겁박하는 유사언론 행위보다 더 큰 위협은 불순한 정치적 의도로 언론의 자유를 겁박하려는 유사정책행위다. 정부가 지금 군소 인터넷 신문사들에 뭐라 나무랄 입장이 아니라는 소리다.

<민경배(경희사이버대학교 모바일융합학과 교수)>

비상식의 사회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