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은수저는 ‘헬조선’의 박탈감 유발자 ‘금수저 은수저’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가계에서 개인에게만 상속되는 ‘은수저’와 달리, 이 학교의 은수저는 학생 모두를 위한 것이다.
추석 즈음하여 몹시 우울했다. 굳이 우울의 이유를 찾자면 ‘헬조선’ 때문이었다. ‘노오력’ 따위 엿이나 먹으라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만화를 읽어야 밥 먹고사는 주제에 그것조차 ‘노오력’마냥 느껴졌다. 연휴 마지막 날에야 정말로 쉬자며 평소 좋아하던 작가의 최근작을 잡았다. 그리고 그 덕에 가까스로 우울 속에서 허우적대지 않을 수 있었다. <강철의 연금술사>로 잘 알려진 아라카와 히로무의 <은수저> (학산문화사)가 바로 그 만화다.
하치켄 유고는 한국 못지않은 일본의 입시경쟁에 지쳐버렸다. 무엇보다 “유고, 학벌 없는 놈은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다. 세상은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 아버지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입시명문으로 소문난 중학교를 뛰쳐나와 홋카이도 시골의 농고로 진학하고 기숙사에 입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에 이왕이면 덜한 경쟁 속에서 좋은 내신 점수를 확보해 보겠다는 속셈과 함께 하치켄은 농고에서의 첫 학기를 시작한다.

아라카와 히로무 작가의 만화 <은수저>의 한 장면. / 학산문화사 제공
이런 하치켄의 농고 생활은 저 유명한 명작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의 농구인생과 비견해 조망될 수 있다. 둘 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고, 고교 1학년에 이르러 ‘흑심’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했다는 점은 같다. 하지만 강백호와 하치켄은 인물됨이 극과 극이라 할 만하다. 강인한 육체와 돌머리 그리고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불량 청소년’ 강백호와 달리 하치켄은 생각이 깊고 유약하며 자신감이 부족한 모범생이다. 서태웅에 대한 질투와 경쟁의식이 강백호의 농구에 대한 열의를 부추겼다면 하치켄은 친구와 가축 등 마음 가는 대상에게 진심을 다하다 보니 농축산업에 대한 마음 또한 깊어져 버렸다. 무엇보다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핵심 배경인 농고와 농구가 무척이나 다르다. 소년만화의 주류인 스포츠가 아닌 농업이라니.
이렇게 <은수저>는 우정과 성장이라는 일본 소년만화의 공식을 따르되 전혀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와 배경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러면서도 일본에서는 <슬램덩크>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하며 일본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3권까지 나온 현재 권당 100만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과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일본에서만큼은 아니라도 <은수저>는 한국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헬조선’ 한국에서 만나는 이 작품은 인기 말고도 이야기할 거리가 무척이나 많다. 나를 ‘헬조선’의 우울에서 구해낸 그 힘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픈 마음이 가득하다.
그러려면 우선 나를 수렁에 빠트렸던 ‘헬조선’의 우울부터 직면해야겠다. 처음엔 이 적확한 표현에 감탄했고 통쾌했다. 하지만 그 말의 사용법을 여기저기서 확인하면서 이내 우울해졌다. ‘헬조선’, ‘노오력’, ‘금수저, 은수저’ 등의 표현들을 접하며, 흙수저를 물고 헬조선에 태어나 노오오오력하며 사는 나 자신이 못내 서글펐지만 그것 때문에 우울 속에서 버둥댄 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도 ‘죽창’을 들지 못하는 우리네가 안타까웠던 건 약간이나마 우울의 이유라 할 수 있겠지만, ‘헬조선’ 담론이 그토록 우울하게 느껴졌던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헬조선’에서 답 없는 ‘노오력’만 강요받는 데 대한 정당한 반작용일 것이 분명한 냉소를 보며, 외려 막다른 벽 앞에 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만화 <은수저>의 ‘은수저’는 일부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자산을 상징한다. / 학산문화사 제공
주지하듯 ‘헬조선’ 속에서는 노력이 무의미하다. 금수저나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는 한, 노력은 곧 기꺼이 착취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노력하지 않는 것이 착취당하지 않을 길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강요나 다름없는 ‘무한경쟁’과 ‘자기계발’에 대한 이 정당한 거부는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속삭임에 공명해서만 다시금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노력의 길에는 열정 착취와 TV 안팎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도사리고 있다. 거부마저도 가능하지 않은 경우는 또 어떤가. 교육을 볼모로 잡은 입시전쟁은 매해 이어지고, 전장 속의 청소년들은 학벌로 자신의 수저를 보완하려는 노력 외에 다른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냉소를 보낼 여유조차 없는, 그런 ‘헬조선’을 청소년들은 경험하고 있다.
<은수저>의 주인공 하치켄은 그런 ‘헬조선’ 청소년과 거의 비슷한 경험을 거쳐 꿈도 희망도 없이 농고에 진학했다. 이제는 경쟁에서 도피한 채로 아버지로 대표되는 경쟁세계에 냉소를 보낼 수도 있었으련만, 하치켄은 다행히 좋은 만남을 통해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과거의 자신을 계속 마주치면서 새 삶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 그리하여 자신을 다잡을 수 있게 해준 좋은 만남은 모두 학교가 주선해 준 것이다. 이 특출난 학교의 학내 식당 입구에는 은수저가 걸려 있다. 그 의미를 설명하는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을 들어 보자. 핵심은 일부러 살짝 생략하고 변조해 둔다. 스포일러이기도 하지만, 일단 이 글을 통해 대충 듣고 나서 더 상세히 알게 되면 더 크게 와 닿으리라는 ‘흑심’에서다.
일본과 한국서 ‘슬램덩크’ 못지않은 인기
“나는 여러분에게 은수저를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교육에 몸담아 왔습니다. 적으나마 여러분에게 ‘살아갈 힘’을 줄 수 있다면 그게 더없는 행복이죠.”
“앞으로 여러분이 종사할 일에는 도구나 노하우가 필요하며, 그것은 자기 아닌 다른 누군가가 쌓아온 역사입니다.”
“이 학교에서 여러분이 경험한 일들은 선배들이 하나둘씩 쌓아올린 역사를 이어받았다는 뜻이에요.”
“꿈이 있는 사람에게나 없는 사람에게나 평등하게, 은수저의 마음은 여러분을 위해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것을 마음껏 사용하세요.”
이 따뜻한 훈화 속에서 은수저는 ‘헬조선’의 박탈감 유발자 ‘은수저’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가계에서 개인에게만 상속되는 ‘은수저’와 달리, 이 학교의 은수저는 학생 모두를 위한 것이다. 이어지되, 소수에게만 상속됨으로써 다수를 배제하고 박탈하는 ‘은수저’와는 전혀 다르게 이어진다. 힘이 되되, 소수가 만들어 가지고 배타적으로 전횡하는 ‘은수저’와는 전혀 다르게 힘이 된다. 여럿이 만들고 여럿이 누리며 여럿에게 이어진다. 이런 공유자산으로서의 은수저를 물고 태어날/살아갈 기회를 이 가상의 학교는 행복하게 나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런 은수저를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나눌 길을 떠올리다 보니 우울에 빠져 허우적댈 겨를이 없었다.
물론 이 훈화 말씀 속의 학교는 가상의 세계이며, 우리가 ‘헬조선’이라 부르는 세계로 곧바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차라리 적용하지 말고, 요구하자. 그것을 내놓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자. ‘헬조선’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은수저’보다 더 강력한 은수저, 바로 그것을 말하고 궁리하고 만들어내자. 모두의 은수저를 이 국가와 사회에 요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노오력’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어차피 허황된 ‘노오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착취당하지 않을 방향으로 쏟아붓는 게 낫지 않겠나.
<조익상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