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람찬 평생 일터’는 과연 존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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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평생 안고 가야 하지만, 세상은 나를 언제든 대체할 수 있다. 소문에는 그렇지 않은 세상도 어디에 있다고는 하던데.

얼마 전 퇴사를 한 지인의 SNS에서 한 문장을 읽었다.

“퇴사를 하려면 가을에 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지인은 아마도 지하철 4호선 이수역 지나는 구간으로 추정되는 지하철 창밖의 사진을 함께 찍어 올렸다. 그 구간은 경치가 참 좋다. 그걸 읽고 나는 사무실 창문으로 다가가서 파란 하늘을 보았다. 그렇지, 퇴사를 하려면 가을에 해야겠어. 속으로 몇 번 중얼거렸다. 그때는 앞으로 여기에서 1년은 더 일할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재계약 날짜를 2주일 조금 안 남겨두었을 무렵이었다. 마지막 추석 선물을 양손에 묵직하게 들고서 그때 보았던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내 주변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녔고, 햇빛은 적당히 맑았다. 어처구니없게도 계절이 좋아서 가슴이 일렁거렸다.

당연한 소리지만 나에게 나는 유일하고 무이한,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한 존재다. 나는 내가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 모두는 내가 아니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나보다 중요한’ 무언가의 교환가치가 되기도 하고, 나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 업무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 되기도 한다. 설령 나한테는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해도 그렇다. 물론 나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이 직장에서 첫 휴가를 갔을 때를 떠올렸다. 다른 사람에게 간섭 받기 어려운 총체적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나는 마음이 불안해서 온갖 준비를 다했다. 결국 상사의 책상 위에 A4용지 한 장짜리의 꽤 정중한 ‘잔소리 편지’를 놓아두고 퇴근을 했다. 그러고 나서도 몇몇 주변 사람들에게 휴가 가기가 걱정되는 마음을 토로하자, 한 명이 말했다.

“아직 회사를 오래 안 다녀서 그래. 더 다녀 보면 내가 없어도 다 잘 굴러가는 걸 알게 될 거야.”

닷새간의 휴가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나는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조금 서툰 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조합원들은 나 없이도 내 업무를 돌아가면서 잘 메우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안도했고 기뻤고 고마웠다. 그렇지만 내가 대체 가능한 인력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하자 마음이 서늘했다. 내가 이 직장에서 관철하려고 했던 것들, 계획했던 것들은 해고도 아니고 ‘계약 만료’라는 이름 앞에서 아무 의미 없는 언어가 되었다.

8년 전에는 어느 파업현장에 있었다. 20대 초반의 나는 해고를 당한 50대 여성 조합원들 앞에서 민중가요에 맞춰 율동을 했다. 그 노래 중간에는 ‘우리의 바람은 보람찬 평생 일터’라는 가사가 있었다. 그렇게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지만 ‘보람찬 평생 일터’가 무엇인지 나는 아직까지 알지 못한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아마 몰랐을 것이다. 나는 나를 평생 안고 가야 하지만, 세상은 나를 언제든 대체할 수 있으니까. 소문에는 그렇지 않은 세상도 어디에 있다고는 하던데.

‘가을방학’이라는 음악 그룹의 새 앨범이 9월에 나왔다. 세상은 굉장히 가시밭길같지만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깊게 절망하기도 애매하고 우주가 도와준다는 식으로 긍정적이기도 애매하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애매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를 가을마다 그 그룹의 노래에서 듣는다. 백수가 된 김에 1집 앨범에 실려 있는 ‘가을방학’이라는 노래를 추석 연휴 내내 들었다. ‘싫은 걸 참아내는 것만큼 좋아하는 마음을 맞바꾼 건 아닐까’라는 가사를 들을 때면 몇 번 조용히 따라 불러 보았다.

연휴가 끝나고 나서 회사 일 때문에 잃어버린 지 3개월이 지나도록 방치했던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주민센터로 갔다. 오전 11시의 가을햇살은 눈이 부셨다. 그저 회사에서 잘린 것뿐인데 무슨 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찬란해서 페달을 밟으면서 괜히 벅찼다.

아마 내 삶에는 앞으로도 참아내야 할 것들투성이일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는 있을 거라는 태평하고 속없는 생각을 했다. 살아온 스물여덟 해 처음으로 가을방학도 맞게 되었으니, 아마 그렇지 않을까.

<이서영 일못하는 사람 유니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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