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는 아무리 허리를 졸라매도 개미였다. 베짱이는 아무리 놀고먹어도 베짱이였다. 죽어라고 허리를 졸라매고 땀을 흘린 개미 덕에 나라는 급속 성장을 이루고 부유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개미의 나라가 아니었다.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린 ‘개미와 베짱이’란 우화는 지금도 삽화와 함께 생생히 기억된다. 여름내 나무 위에서 바이올린을 켜며 놀고먹던 베짱이는 겨울이 오자, 개미의 집에 구걸을 하러 온다. 여름에 땀 흘려 부지런히 일한 개미는 따뜻한 난로가 있는 집안에서 가족들과 밥상에 둘러앉아 단란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누더기 행색의 베짱이는 추위에 떨며 구걸을 했다.
어려서 이런 우화를 배운 ‘개미’들은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자’는 ‘어느 불행한 군인’의 말에 ‘새 아침이 밝’기 무섭게 ‘너도 나도 일어나’ 죽어라고 땀을 흘리며 일을 했다. 배가 고플 때마다 조금만 참고 더 일하라는 말에 사정없이 허리를 졸라매는 게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으로 알았다. 그런데 평생을 허리를 졸라매며 ‘일하며 싸’워온 개미들에게 돌아온 것은 IMF사태라는 혹독한 겨울이었다. 살을 에는 외환 파동의 추위가 닥쳐오자, 그저 죽어라고 일만 해온 개미들은 졸지에 거리로 쫓겨나 노숙인이 돼야 했다. 그런데 부동산 투기로 대를 이어 놀고먹던 베짱이들은 콧노래를 불러댔다. 현실은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린 우화와 달랐다.

어찌 젊은 개미의 일자리가 없는 게 늙은 개미 탓이란 말인가. 사진은 노동시장 개혁으로 청년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고용노동부의 광고. / 고용노동부
‘파이’를 더 키워도 개미들은 늘 배고파
배가 고프다고 할 때마다 베짱이들은 ‘파이’를 더 키우라고 했다. 도토리를 더 주워오라고 했다. 개미는 허리를 졸라매고 파이를 키우고, 도토리를 더 열심히 주워왔다. 파이는 더 커지고, 도토리는 수북하게 쌓였다. 그러나 여전히 개미들은 허리를 졸라매야 했고, 배가 고파야 했다. 일하지 않는 베짱이와 여왕개미들이 제 배를 채우느라 다 떼어먹는 데야 아무리 큰 파이를 빚어도, 아무리 많은 도토리를 주워와도 소용이 없었다.
개미들은 불평하기 시작했다. 개미들이 한데 뭉쳐 대들자, 베짱이들은 개미들을 둘로 나누었다. 말을 잘 듣는 개미들을 남겨두고, 까칠하게 대드는 개미들은 화장실을 자주 간다느니, 일을 못한다는 핑계로 내쫓았다. 살아남은 개미들은 정규직이 됐고, 쫓겨난 개미들은 비정규직이 됐다. 베짱이들은 비정규직 개미들의 도토리를 뺏어다가 정규직 개미에게 얹어줬다.
현실은 교과서의 우화와 반대였다. 개미는 아무리 허리를 졸라매도 개미였다. 베짱이는 아무리 놀고먹어도 베짱이였다. 죽어라고 허리를 졸라매고 땀을 흘린 개미 덕에 나라는 급속 성장을 이루고 부유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개미의 나라가 아니었다.
아무리 나라가 세계 11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면 무얼 하겠는가. 아무리 재벌들이 세계 유수의 기업들을 문어발처럼 거느리고 있으면 무얼 하겠는가. 제대로 나누지 않는다면 개미는 아무리 허리를 졸라매고 땀을 흘려도 겨울이 닥쳐오면 거리로 내쫓겨 추위에 떨어야 할 운명에 놓일 수밖에 없다. 따뜻한 집안에서 단란한 식사를 하는 건 베짱이와 여왕개미일 뿐이다.
파이를 키워야 나눠 먹을 게 많다는 성장론자들의 말은 올바른 분배가 전제돼야 가능한 일이다. 분배를 공정하게 하는 문제는 복지의 기본이며, 이를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베짱이들의 속셈은 커진 파이를 제 배만 불리게 먹어야 한다는 욕심의 또 다른 표현이다. ‘무상’이라는 말만 들어도 ‘좌파’들의 무책임한 선동에 불과하다며 경기를 일으키는 베짱이들은 유럽 국가들의 복지정책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한다.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와 이인제 노동시장 선진화특위 위원장이 노동개혁 5대법안 제출을 위해 9월 16일 오후 국회 의안과 의안문을 들어서고 있다. / 권호욱 선임기자
민주주의는 대중의 복지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포퓰리즘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에 가깝다. 어째서 많은 개미들이 소수의 베짱이와 여왕개미들을 위해 허리를 졸라매야 하는가. 복지가 망국병이라며 애국주의를 둘러대는 여왕개미의 속내야말로 국가를 내세워 제 배만 불리고 부귀를 누리려는 협박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애국을 말하려면 베짱이들부터 허리를 졸라매고, 여왕개미부터 안가에서 기어 나와 땡볕에서 땀을 흘려야 할 것이다.
일하는 개미가 없이 어찌 나라가 있을 수 있고, 땀 흘려 일한 개미가 행복하지 않은 세상에 어떤 포퓰리즘이 있겠는가. 기회가 된다면 더욱 더 ‘포퓰러’ 해야 한다.
놀고먹는 베짱이는 언제나 호의호식
개미를 정규와 비정규로 나누더니, 이젠 그도 모자라 늙은 개미와 젊은 개미로 나누고 있다. ‘노동개혁이 청년의 미래이다’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늙은 개미의 일자리를 빼앗아 젊은 개미에게 줘야 한다고 을러댄다. 비정규직의 도토리를 빼앗아 정규직 개미에게 얹어주던 수법을 그대로 써먹으려 한다. 그야말로 조삼모사의 잔재주가 아닐 수 없다.
어찌 젊은 개미의 일자리가 없는 게 늙은 개미 탓이란 말인가. 제대로 된 노동개혁이라면, 열 명이 할 일을 다섯 명에게 시켜 이윤만 늘리려는 기업들의 행태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 아닌가. 정녕 젊은 개미의 미래를 걱정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여왕개미라면 일하지 않으며 제 배만 불리는 베짱이들의 허리부터 졸라매는 일에 나서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노동개혁이라고 정부가 내세운 것들을 이리저리 둘러댄 포장을 벗겨보면, 한마디로 기업들이 지금보다 더 쉽게 노동자들의 목을 치게 한다는 것이다.
‘불성실한’ 노동자를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게 한다는 기준이 과연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 성실의 기준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나태하고 무단결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제재의 수단이 지금은 없다는 말인가. 그것은 ‘불성실’이라는 해고의 검으로 제게 대들거나, 눈에 벗어난 개미들의 목을 쳐서 모든 개미가 더욱 허리를 졸라매고 죽어라고 일만 하게 하려는 베짱이의 욕심이 아니겠는가. 그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열 명이 일하던 걸 다섯 명의 개미에게 시키던 걸로도 모자라 ‘불성실’을 앞세워 세 명에게 시키려는 ‘노동개혁’의 의도가 아니겠는가. 개미는 언제까지 허리를 졸라매야 하는가. 제대로 나눠주지 않는 파이를 왜 땀을 흘려 빚어야 할까. 여름내 땀 흘린 개미가 추운 겨울에 거리로 내몰리고, 놀고먹은 베짱이는 호의호식하는 이 비상식의 우화를 언제까지 들여다봐야 하는가.
<이시백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