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조 중의 흉조 ‘형혹수심’ 천문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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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세상에서도 영원한 제국을 소유하고자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능을 조성했던 진시황. 정작 죽어서는 시신이 썩을 때까지 수레에서 내려오지도 못했고, 평생을 바쳐 일군 진제국도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 어찌 형혹이 심수를 침범했기 때문이라 하겠는가.

수화(綬和) 2년(기원전 7년) 봄, 흉조 중의 흉조라는 천문현상이 일어났다. 형혹수심(熒惑守心). 형혹(화성)이 이동하다가 심수(心宿, 전갈자리)에서 머무는 현상을 형혹수심라고 한다. 화성과 전갈자리 모두 붉은 빛이니 공포심을 더욱 자아냈을 것이다. 게다가 화성은 동서를 막론하고 전쟁과 죽음을 상징했다. 또한 심수를 구성하는 심전성(心前星)·심중성(心中星)·심후성(心後星)은 중국에서 태자·천자·서자를 상징했다. 형혹이 심수에 머무는 것은 천자에게 변고가 생길 징조였다. 천자가 그 자리를 잃거나 죽음을 맞게 될 아주 불길한 징조.

이 불길한 징조에 한나라 성제(成帝)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즉시 승상 적방진(翟方進)을 불러들였다. 승상이 제 역할을 못했기에 천상에 이변이 생긴 것이라며 호되게 질책했다. 성제는 승상을 희생양으로 삼고자 작정했다. 적방진은 자신에게 닥칠 불행을 예감하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성제는 적방진에게 나라를 걱정해주길 바란다는 조서와 함께 술과 소고기를 보내왔다. 죽음을 내린다는 의미였다. 적방진은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성제는 그가 갑작스런 병으로 죽었다고 공포한 뒤 몸소 조문하러 갔다. 승상에게 재앙을 전가했으니 자신은 무탈하리라 안도하면서.

병마용 1호갱

병마용 1호갱

운성에 새겨진 ‘시황제가 죽어 땅이 나뉜다’
성제 때의 사건이 있기 200년 전 즈음에도 똑같은 천문현상이 일어났다. 진시황 때(기원전 211년)였다. 형혹이 심수에 머무른 데 이어서 운성(隕星)이 동군(東郡)에 떨어졌다. 누군가 이 운성에 ‘시황제가 죽어서 땅이 나뉜다’라고 새겼다. 진시황은 어사를 보내 누구의 소행인지 알아보게 했다. 다들 부인하자 진시황은 운성이 떨어진 곳 인근에 거주하는 백성을 죄다 죽였다. 불길한 징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떤 이가 진시황의 사자에게 벽옥(璧玉)을 건네며 진시황에게 전해주라고 하면서 “올해 조룡(祖龍)이 죽는다오”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 용은 황제를 상징한다. 조룡은 용의 시조이니 최초로 황제를 자처한 진시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자의 말을 전해들은 진시황은 “산 귀신은 1년의 일밖에 모른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애썼다. 이미 가을이니 한 해는 곧 지나갈 터였다. 진시황은 “조룡은 인간의 시조”라며 조룡이 자신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고 하면서도 벽옥의 출처를 알아보게 했다. 놀랍게도 8년 전 천하를 순행할 때 강에 빠뜨렸던 게 아닌가. 불길함을 느낀 진시황은 점을 쳤다. 이동하는 게 길하다는 점괘가 나오자 진시황은 무려 3만호를 북하(北河)와 유중(楡中)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이동하는 게 길하다는 점괘 때문이었을까. 진시황은 순행에 나섰다. 가을에 시작된 이 순행은 이듬해 여름까지 이어졌다. 그의 마지막 순행이었다. 진시황은 이 순행길에 세상을 떠났다. 함양을 떠나 사구(沙丘)에서 죽기까지 아홉 달 동안의 진시황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게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죽지 않는 삶’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마지막 순행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승복이었다.

진시황은 회계산에 올라 비석을 세웠다. 영원한 돌과 더불어 거기에 새긴 송가 역시 영원하리라 믿었으리라. 더욱 바라 마지않은 것은 ‘살아서’ 그 찬송을 받는 것이었다. 불사약을 구해주겠다던 방사들이 도망친 게 2년 전, 그에 대한 보복으로 갱유(坑儒) 사건을 자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순행에서 낭야에 이르렀을 때 방사 서불을 만나게 된다. 서불은 서복(徐福)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동남동녀 3000명을 데리고 사라져버리는 바로 그 인물이다. 서복은 이름처럼 복이 많은 듯하다. 그는 불사약을 구하러 동쪽에 와 있었던 덕분에 함양에서 벌어진 갱유 사건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불사약을 구해주겠다며 떠난 지 몇 년이나 지난 바로 이 시점에서, 이미 방사를 불신하게 된 진시황을 다시 한 번 성공적으로 꼬드긴다. 봉래(蓬萊)에 있는 약을 구할 수 있지만 커다란 상어 때문에 그곳에 갈 수 없으니 활로 쏘아 달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진시황은 해신과 싸우는 꿈을 꾸게 된다. 악신을 제거해야 선신이 임한다는 해몽이 나오자 진시황은 지부에서 커다란 물고기를 쏘아 죽이기까지 했다. 장애물을 제거했으니 봉래에 있는 불사약을 곧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진시황은 기대했다. 그의 기대와 그의 절실함 덕분에 서복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서복은 불사약을 가져오겠다는 희망을 남기고 떠났다.

서복이 동쪽 바다로 떠난 사이 진시황은 병에 걸렸다. 그는 죽음을 언급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시간이 끝내 다가오고야 말았다. “올해 조룡이 죽는다오”라는 말이 있은 지 채 1년이 되기 전이었다. 진시황은 큰아들 부소(扶蘇)에게 함양으로 돌아와서 장례를 치르라는 유조를 남겼다. 부소는 갱유 사건 당시 이를 말리다가 진시황의 노여움을 산 탓에 북쪽 상군(上郡)으로 보내져 거기서 지내던 중이었다. 부소에게 남긴 유조는 그가 후계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유조는 부소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유조를 보관하고 있던 조고(趙高)의 주도 하에 진시황의 막내아들 호해(胡亥), 승상 이사(李斯)가 유조를 조작한 것이다. 호해는 황제가 되려는 욕망 때문에, 조고와 이사는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고 더 큰 이득을 얻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의기투합했다. 부소가 황제가 된다면, 이사와 조고의 정적이자 부소의 측근인 몽염(蒙恬)과 몽의(蒙毅) 형제가 이사와 조고의 지위를 위협할 터였다. 호해를 태자로 삼는다는 내용으로 유조는 조작됐고, 부소에게 죽음을 명하는 편지도 날조됐다. 그들의 음모는 은밀했지만 한창 무더운 여름날 시신이 썩는 냄새를 감추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세 사람의 음모가 진행되는 사이, 진시황의 시신은 그 냄새를 감추기 위한 생선이 가득 실린 수레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여산의 진시황릉

여산의 진시황릉

무엇이 진나라를 망하게 했나
조작된 유조가 부소에게 전달되고 부소는 자살했다. 부소의 죽음을 확인한 뒤에야 호해 일행은 함양으로 돌아와 진시황의 죽음을 세상에 알렸다. 호해는 몽의를 죽게 하고 이어서 몽염을 죽게 했다. 독약을 삼키고 자살하기 직전에 몽염은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잘못도 없는데 죽어야 한단 말인가?”라며 한참을 있다가 이렇게 말한다. “나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임조에서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리가 넘게 장성을 쌓았으니, 어찌 지맥을 끊어놓은 일이 없었겠는가? 이게 바로 나의 죄이리라.” 사마천은 <사기>에서 자신이 북쪽 변경에서 장안으로 오는 도중에 몽염이 쌓은 장성과 직도(直道, 군용 고속도로)를 보면서 느낀 감회를 토로하길, “이것은 백성의 노고를 참으로 가볍게 여긴 것”이라고 했다. 또한 진시황의 야심에 동조해 공사를 일으켰으니 죽임을 당한 게 마땅하거늘 “어찌 지맥을 끊은 것에 죄를 돌리려 하는가”라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하지만 전제왕조시대의 신하가 어찌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더더욱 최고 권력자를 추궁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성의 노고를 참으로 가볍게 여겼기에 죽음보다 더한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은 바로 진시황이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됐다.

진시황은 일찍이 방사 노생을 시켜서 신선을 찾게 했는데, 그가 돌아와서 올린 도참서에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진시황은 몽염에게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치게 하고서 장성을 쌓고 직도를 만들게 했다. 북방 유목민족이야말로 진시황이 생각했던 가장 큰 위협이었던 것이다. 정작 진나라를 붕괴시킨 주범은 진시황이 그토록 아낀 호해다. 호해는 막내아들인데, 황제가 됐고 그 과정 역시 떳떳하지 못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2세 황제 호해는 자신의 최측근 조고에게 물었다. “천하를 오래도록 소유하면서 천수를 누리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소?” 조고가 내놓은 방안은 법을 엄격히 시행해서 걸리적거리는 인물을 죄다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호해는 진시황 때의 신하들과 자신의 형제자매 가운데 죄를 지은 이가 있으면 조고에게 심의해 처형하게 했다. 그 결과 공자 12명과 공주 10명이 비참하게 죽었다. 사지가 찢겨 죽은 이들도 많았는데, 자진해서 죽기를 청한 공자 고(高)의 상황은 그나마 나았다. 가족이 연좌될까 봐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서 공자 고는 부황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따라 죽지 못한 불효와 불충의 죄를 아뢰며 이제 따라 죽고자 하니 부황의 묘가 있는 여산 기슭에 묻어달라고 청한다. 호해는 기뻐하며 10만 전을 하사해 고의 묘를 만들게 했다.

공자 고가 가까이 묻히길 바랐던 진시황의 능에는 세상의 모든 진귀한 것들이 다 들어갔다고 한다. 위에는 천문(天文)을 재현하고 아래에는 지리를 재현했다. 수은으로 강과 바다까지 흘러가게 만들고, 접근하는 이가 있으면 자동으로 발사되는 활까지 배치했다. 이 기계 장치를 만든 장인들은 능 안에 산 채로 갇혔다. 비밀이 누설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진시황의 후궁들 가운데 자식이 없는 이들도 죄다 순장됐다. 이렇게 진시황의 안장을 끝낸 호해가 황제에 오른 첫 해에 한 일이 바로 형제자매를 죄다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그는 정말 황제노릇을 하고 싶었던 듯하다. 온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자 순행에 나섰고 아방궁 공사를 재개했고 전보다 더 가혹하게 법을 집행했다. 하지만 천하를 오래도록 소유하면서 천수를 누리고 싶다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가 황제가 되자마자 진승(陳勝)의 반란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다. 연·조·제·초·한·위의 육국이 모두 부활했고, 호해는 자살했다. 황제가 된 지 3년이 되던 해였다. 함양에 들어온 항우(項羽)는 진나라의 마지막 왕 자영을 비롯해 진나라 왕족을 죄다 죽이고 함양의 백성을 살육하고 궁전을 불태웠다. 항우는 진나라의 발원지인 관중 일대를 옹(雍)·새(塞)·적(翟)으로 나누고 각 땅에 왕을 봉했다. 기원전 211년 형혹이 심수에 머문 해에 떨어진 운성에 새겨진, ‘시황제가 죽어서 땅이 나뉜다’라는 예언이 이뤄진 것이다.

한나라 성제의 연릉

한나라 성제의 연릉

똑같은 ‘형혹수심’ 현상에 다른 대처
1974년 여산 진시황릉에서 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서 발굴된 병마용갱의 8000여점에 달하는 병사와 말은 모든 이를 압도하는 규모다. 진시황은 지상의 제국을 사후의 세계에서도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다.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살고자 불사약을 그토록 갈구했고, 혹시라도 가게 될 저 세상에서도 영원한 제국을 소유하고자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능을 조성했던 진시황. 정작 죽어서는 시신이 썩을 때까지 수레에서 내려오지도 못했고, 평생을 바쳐 일군 진제국도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 어찌 형혹이 심수를 침범했기 때문이라 하겠는가.

한나라 성제는 형혹이 심수에 머무르자 승상을 죽임으로써 화를 피하고자 했으나 승상이 죽은 다음 달에 자신도 죽고 말았다. 성제는 황제로서 최악이었다. 그는 국정을 외척에게 맡겨놓고 술과 여자에 빠져 지냈다. 게다가 장안성 서북쪽에 이미 연릉(延陵)을 조성했음에도 연릉의 풍수가 좋지 않다면서 장안성 동쪽에 창릉(昌陵)을 만들게 했다. 창릉을 짓느라 백성은 피폐해졌다. 거리에는 굶어죽은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였고, 재이가 잇달아 발생했다. 성제는 결국 창릉 공사를 중단하는데,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창릉의 흙이 자신의 영혼을 지켜줄 수 없다는 말 때문이었다. 성제의 죽음이 어찌 형혹이 심수를 침범했기 때문이라 하겠는가. 그는 하늘의 재이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고 올바른 대처도 하지 못했다.

똑같은 ‘형혹수심’ 현상에 전혀 다른 대처를 했던 이가 있다. 춘추시대 송나라의 경공(景公)이다. 별자리를 관측하는 관리 자위(子韋)가 경공한테 말하길, 재앙을 재상에게 전가하면 된다고 하자 경공은 “재상은 나의 팔과 다리”라며 거절한다. 백성에게 전가하면 된다고 하자 “군주는 백성에게 의지한다”라며 거절한다. 한 해의 수확에 전가하면 된다고 하자 “흉년이 들면 백성들이 고통에 빠질 텐데, 내가 누구를 위한 군주인가”라며 거절한다. 마침내 자위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높긴 하지만 낮은 곳의 소리를 잘 들으니, 군주께서 지금 군주답게 하신 세 가지 말씀에 형혹이 반드시 움직일 것입니다.” 결국 형혹이 심수에서 살짝 비켜났다. 이 일이 있고서 경공은 25년이 넘도록 왕위에 있었다. 최근 들어 형혹이 심수에 머무른 천문현상은 2001년에 있었고, 다음에 일어나는 시기는 바로 내년 2016년이다. 하늘이 높긴 하지만 낮은 곳의 소리를 잘 듣는다는 말, 정말 믿고 싶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이유진의 중국 도읍지 기행 / 시안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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