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 인류학
헤더 몽고메리 지음·정연우 옮김 연암서가·2만3000원
각종 육아법이 쏟아져 나온다. 아이를 키우는 데 정답이 있을까? 지은이의 대답은 ‘없다’이다. 역사적으로 모든 사회가 같은 태도로 어린이를 대하지 않았다. 인류학자인 지은이는 지난 150년간 인류학자들이 어린이를 연구한 방법, 민족지에 묘사한 어린이의 모습, 인류학 연구에서 어린이가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줌으로써 어린이들의 일상생활과 유년기에 대한 사회적 믿음이 얼마나 다양하게 존재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신간 탐색]아이 키우는 데 정답은 없다](https://img.khan.co.kr/newsmaker/1144/20150922_80.jpg)
보편적인 육아법이 없었듯이 보편적으로 ‘어린이’를 정의할 수도 없다. 물론 국제법은 유년기를 0세에서 18세 사이로 정의하고 있다. 신체적 특징에 따른 정의다. 그러나 수정, 출생, 첫 월경 등과 같은 명확한 신체적 표징만으로 유년기를 정의할 수 있을까.
이 책의 지은이는 나이나 신체적 표징보다는 그 표징에 부여된 문화적 상징에 주목한다. 문화적 상징은 사회마다 다르다. 어떤 사회는 태어나기 전부터 어린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떤 사회는 성인식을 치르고 결혼을 해도 어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각 사회마다 어린이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는 것은 각 사회마다 육아에 대한 접근이 달랐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인식은 특정 육아법만 옳고 다른 육아법은 무지몽매하다는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잘 모르는 문화권의 육아법이 이상하거나 위험해 보여도 그들의 문화적 맥락에서 어린이가 어떤 존재인지 이해해 보고, 그들이 무슨 이유에서 그런 육아 방식을 취했는지를 알아본다면 다른 부모들을 향해 쉽게 가치판단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모든 육아 방식을 용납하자는 것은 아니다. 한 사회가 어린이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폭넓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용납할 수 있는 육아 방식과 부당한 학대를 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인류학적으로 어린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다루면서 지은이는 이분법적 논리로 어린이를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어린이는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인가? 아니면 완전해지는 과정에 있는 존재인가? 어린이는 수동적인가? 아니면 능동적인가? 어느 쪽으로도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다. 어른이건 어린이건 모두 다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사는 존재인 만큼 어느 하나만 따로 떼어놓고 대상화해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 지은이의 결론이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