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여산행을 강행한 경종은 유왕·진시황·현종·목종의 전철을 밟았다. 이 어찌 여산의 불행이 그를 덮친 것이랴. 나라를 돌보지 않고 자신의 욕망만을 좇은 대가일 터.
“거긴 절대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기어코 가겠다는 황제를 신하들이 극구 말린다. 좌복야 이강(李絳)과 간의대부 장중방(張仲方)이 여러 번 간언했지만 씨도 먹히지 않는다. 이번에는 습유 장권여(張權輿)가 나섰다. 그는 바짝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옛날에 주나라 유왕(幽王)은 여산(驪山)에 행차했다가 견융(犬戎)에게 피살당했습니다. 진시황이 여산에 묻힌 뒤 그 나라가 망했사옵니다. 현종께서 여산에 궁을 짓고 지내시다가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선제께서는 여산에 행차하셨다가 오래 사시지 못했사옵니다.”
이야기의 장소는 장안성 대명궁의 자신전(紫宸殿), 때는 바야흐로 보력(寶曆) 원년(825), 신하들의 읍소를 듣고 있는 황제는 열일곱의 경종(敬宗)이다. 엎드려 조아리며 간청한 것이나 언중유골이다. 만약 여산에 갔다가는 목숨도 나라도 잃을 것이라는 섬뜩한 말이 아닌가. 경종이 열여섯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게 바로 지난해인 824년, 그의 아버지 목종(穆宗)은 822년 겨울 어느 날 화청궁에 다녀온 뒤 앓다가 2년만에 서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왕부터 시작해 진시황, 현종, 그리고 아버지에게까지 여산의 불길함이 덮쳤다는 말에도 경종은 아랑곳없다.
“여산이 그토록 불길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가서 그대 말이 맞는지 시험해보도록 하지.”
결국 경종은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여산행을 강행한다. 그리고 무사히 환궁한 경종, “머리 조아리던 자의 말이 어찌 믿을 만한가!”라고 코웃음 치던 이때만 하더라도 여산의 불길함이 자신을 휘감고 있음을 전혀 몰랐으리라.

여산 화청지의 양귀비상
국정보다 노는 데 탐닉한 목종과 경종
경종은 아버지 목종을 여러 면에서 쏙 빼닮았다. 국정엔 관심이 없고 오직 노는 데만 탐닉했다. 두 사람 모두 각저(角抵, 씨름)와 격국(擊鞠, 폴로) 마니아였다. 목종이 앓아눕게 된 것도 사실 격국 때문이다. 그는 화청궁에서 돌아온 지 며칠 뒤 환관들과 격국을 하다가 그 중 한 명이 별안간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쇼크를 받아 중풍에 걸렸다. 목종과 경종은 토목공사에도 열을 올려 여기저기에 건물이 들어섰다.
열일곱의 철없는 황제를 보며 나라의 앞날이 심히 걱정스런 스물셋의 젊은이, 그는 작금의 사태가 천년 전의 데자뷰로 다가오는 듯했다. 이에 그가 지은 글이 그 유명한 <아방궁부(阿房宮賦)>다. “여섯 나라가 멸망하고 천하가 통일되자 촉산(蜀山)이 민둥산이 되고 아방궁이 나타났다네. 300여 리를 덮어 하늘의 해를 가렸지”로 시작하는 이 글에서 시인 두목(杜牧)은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쳐 아방궁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묘사했다.
두목의 시대로부터 1000년 전 아방궁의 실체를 알기 위해 일단 지리적 윤곽을 간략히 그려보자. 진·한·당이 도읍한 장안·함양(咸陽) 일대는 관중(關中)평원 중부에 해당한다. 그리고 황하의 주요 지류인 위수(謂水)가 이 관중평원을 관통한다. 바로 이 위수 주변에 역대 왕조의 궁전이 자리했다. 진시황이라고 하면 으레 떠오르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아방궁이다. 사실 그가 지은 궁전은 아방궁뿐만이 아니다. 진시황은 전국시대의 여러 나라를 하나씩 멸망시킬 때마다 그 나라의 궁전을 그대로 본떠서 함양 일대에 지었다. 이러한 재현은 그 나라가 진나라에 속하게 됐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진시황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는 ‘통일’이다.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그는 문자를 통일했고 도량형을 통일했고 화폐를 통일했고 수레바퀴의 폭을 통일했다. 또 장성이라는 경계를 쌓음으로써 북방 유목민족의 비(非)중국세계에 맞선 중국이라는 통일된 공간 관념을 창출했다. 마오쩌둥이 진시황을 두고 “공자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고 평가한 것도 바로 통일의 업적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의 원형을 빚은 그의 이름은 영정이다. 영정은 서른아홉이던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뒤, “호칭을 바꾸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공적을 드러낼 수 없다”며 대신들에게 자신의 적절한 호칭을 논의하게 한다. 그들은 고대의 위대한 다섯 왕인 오제(五帝)도 영정의 업적에 미치지 못하고, 그보다 더 이전에 존재했던 천황(天皇)·지황(地皇)·태황(泰皇) 가운데 태황이 가장 존귀하니 ‘태황’이라는 호칭을 쓸 것을 건의했다. 영정은 태황의 ‘황’과 오제의 ‘제’를 따서 황제(皇帝)라 정한 뒤, “짐은 최초로 황제가 되었으므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하고 후세는 이세(二世)·삼세(三世)로 이어져 만세에 이르기까지 길이 전해지도록 하라”고 했다. 정작 만세는커녕 삼세에서 진나라의 운명이 끝날 줄 어찌 알았으랴. 그는 또 알지 못했다. 자신이 추진한 대규모 토목공사가 멸망의 화근임을.

아방궁 옛터
불멸을 꿈꾼 진시황과 갱유사건
기원전 212년, 진시황은 이전의 궁전이 너무 작다며 위수 남쪽 상림원(上林苑)에 새 궁전을 짓기 시작한다. 바로 아방궁이다. <사기>에 따르면 아방궁 전전(前殿)의 규모만 동서 500보, 남북 50장(丈)에 달하고 1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방궁이 완성됐다면 그 규모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리라. 아방궁은 위수를 사이에 두고 함양궁을 마주보는 자리에 있었다. 원래의 계획대로 아방궁이 완공됐다면, 구름다리 형식의 복도인 각도(閣道)가 위수를 관통하면서 아방궁과 함양궁을 연결했을 터였다. 흥미롭게도 이는 천상(天象)을 땅위에 그대로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위수는 은하수를 상징한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서 북극성과 영실(營室)이 있듯이 함양궁과 아방궁이 있고, 두 별이 각도성으로 연결되듯 함양궁과 아방궁이 각도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북극성과 영실은 천제(天帝)가 거주하는 곳이다. 통일을 이루고 삼황과 오제보다 위대한 ‘황제’가 된 진시황은 불멸의 신적 존재가 되고자 했다.
일찍이 진시황은 황제라는 호칭을 정할 때 그 자신은 스스로를 ‘짐(朕)’이라 부르기로 결정했다. 아방궁 건설을 시작한 해에 그는 ‘짐’ 대신 ‘진인(眞人)’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한다. “운기(雲氣)를 타고 다니며 천지와 더불어서 영원히 존재”하는 진인이 되고자 그는 불사약을 얻고자 했다. 진시황에게 진인의 길을 알려준 건 방사(方士)들이다. 방사 노생(盧生)은 황제가 머무는 장소를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해야 불사약을 구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진시황은 함양 부근 200리 안의 이궁(離宮)과 별관(別館) 270채를 죄다 구름다리 형식의 복도로 연결했다. 그가 함양의 어느 궁전에 행차하고 거처하는지 지상의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지상에서의 모든 것을 성취한 진시황은 ‘영원’으로 눈길을 돌렸지만 그 역시 인간에 불과했다. 방사 노생은 그에게 불사약을 선사하기는커녕 또 다른 방사 후생(侯生)과 함께 도망쳤다. 진시황은 불같이 화를 내며 함양에 있던 방사를 죄다 색출해 460명을 생매장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갱유(坑儒)’ 사건이다. 이때 생매장된 이들 중에 유생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은 방사였다. 진시황의 악행 가운데 손꼽히는 사건으로 역사에 남게 된 이 일은 그저 분풀이였다기보다는 영생의 꿈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좌절감이 빚어낸 것이리라.
기원전 210년에 진시황은 죽어서 여산 기슭에 묻혔다. 아방궁을 짓기 시작한 지 2년이 되던 해이자 갱유 사건이 있은 지도 2년이 되던 해였다. 통일을 이루고 영생까지 꿈꿨지만 그는 이 땅에서 고작 50년을 살다 갔다. 천제가 은하수 위의 다리를 건너 은하수 이편의 궁전에서 저편의 궁전으로 건너가듯 함양성과 아방궁을 오가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이루지 못했다. 아방궁은 미완성으로 남겨졌다. 이세황제 호해(胡亥)는 어떻게든 아방궁을 완성하고자 했다. 황제가 바뀌었으나 가혹한 법 집행, 세금 징수, 노동력 착취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진승(陳勝)이 봉기하자 진나라는 뿌리째 흔들렸다. 여섯 나라는 다시 부활했고 더 이상 통일 제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세황제는 자살했고 그 뒤를 이은 자영은 왕위에 오른 지 46일째에 유방(劉邦)에게 투항했다. 그로부터 한 달 남짓 지나 함양에 들어온 항우(項羽)는 자영을 비롯해 진나라 왕족을 모두 죽이고 궁전을 죄다 불태웠다. 이때의 불길이 석 달 동안이나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가 기원전 206년, 진시황이 죽은 지 불과 4년 뒤였다. 진시황이 이룩한 통일제국은 1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반부패 정책에 제동걸린 ‘신아방궁’
<아방궁부>에서는 항우에 의해 아방궁이 초토화됐다고 한다. 사실 항우가 불태운 건 아방궁이 아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아방궁은 겨우 전전의 기초공사만 이뤄졌을 뿐이며 불에 탄 흔적도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시간상으로도 아방궁은 완공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아방궁은 엄연히 망국을 상징한다. 백성에게 그 거대한 궁전 건설의 짐을 지운 진시황, 그리고 나라가 위기로 치닫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한 채 아방궁 공사를 재개한 이세황제, 이들 때문에 아방궁은 그 자체로 악의 상징이 돼 버렸다.
두목은 자신이 <아방궁부>를 짓게 된 이유가 “보력 연간에 궁전을 대대적으로 짓고 가무와 여색이 범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토목공사에 열을 올렸던 보력 연간의 황제 경종, 그가 굳이 여산에 가려고 했던 건 겨울밤 ‘여우사냥’을 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그는 어느 날 밤 우연히 여우 떼를 활로 쏘아본 뒤로 여우사냥에 빠져들었다. 여우 굴을 찾아 장안에 있는 산이란 산은 죄다 뒤지고 다녔다. 여산이야말로 장안 외곽에 있어서 여우도 많고 행궁까지 있으니 밤새워 사냥하기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그래서 굳이 여산행을 강행했던 것이다. 그 이듬해 겨울, 경종은 또 야간 여우사냥에 나섰다. 유난히 여우가 잘 잡혀 기분 좋은 날이었다. 한밤중에 궁으로 돌아온 경종은 술자리를 열었다. 술기가 올라와 경종이 옷을 갈아입으러 다른 방으로 간 사이에 갑자기 등불이 꺼졌다. 경종은 어둠 속에서 환관에 의해 피살됐다. 열여덟이었다. 이해가 825년, 당나라는 진작 내리막길이었고 환관이 활개를 치던 시절이었다. 환관들은 멋대로 황제를 옹위하고 입맛에 맞지 않으면 시해하기도 했다. 이런 시대에 살면서 유흥에 빠져 지내며 환관을 믿었던 경종은 정말 어리석었다. 신하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여산행을 강행한 경종은 유왕·진시황·현종·목종의 전철을 밟았다. 이 어찌 여산의 불행이 그를 덮친 것이랴. 나라를 돌보지 않고 자신의 욕망만을 좇은 대가일 터.

시안 린퉁구의 갱유곡
그러고 보니 국민당과 공산당의 운명을 뒤바꾼 시안사변이 일어났던 곳도 여산의 화청지다.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는 온힘을 쏟았지만 국민당 내부의 부패는 단속하지 못했다. 그는 그때 공산당 토벌을 독려하러 시안에 갈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부패부터 척결해야 했다. 결국 그는 공산당에 패배하고 타이완으로 쫓겨간 뒤에야 부정부패로 대륙을 잃었다고 생각하며 친·인척까지 가차 없이 처벌하면서 부패와의 전쟁에 들어갔다. 70년이 흐른 지금 공산당 총서기 시진핑 역시 “호랑이(고위직)와 파리(하위직) 모두 때려잡겠다”는 모토를 내걸고 집권 초부터 부패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3년에 공교롭게도 시안 당국은 무려 380억 위안 규모의 ‘아방궁 문화산업 기지’ 건설을 기획 중이었는데, 시진핑의 반부패 드라이브와 맞물려 여론의 뭇매를 맞고 결국 사업을 접었다. 이해 초에 시진핑은 중국 역사상 통치집단의 부패로 정권이 무너진 예를 언급하면서 진나라의 멸망과 관련해 <아방궁부>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 바 있다. ‘신아방궁’이 건설되기엔 그 원죄가 너무 크다. 덧붙이자면, 2015년 9월 3일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항일전쟁승리 70주년 열병식에서는 의장대가 오성홍기(五星紅旗) 게양대까지 121걸음을 걸었다. 121은 1894년 청일전쟁부터 2015년까지의 햇수다.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의 맹주임을 선언한 중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적절히 역사를 환기하고 동원한다. 중국의 역사는 늘 현재진행형으로 읽어내야 한다. 어디 중국의 역사만 그러하랴. “진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슬퍼할 겨를도 없이 망해 버려 후세 사람들이 그들을 슬퍼해주었다. 후세 사람들이 슬퍼만 하고 거울삼지 않는다면 더 후세 사람들 역시 이들을 슬퍼하게 될 것이다.” 시진핑이 인용했던 바로 그 구절이다.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