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가 김찬 부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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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탐색]항일운동가 김찬 부부의 삶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원희복 지음·공명·1만7000원

10년 전이다. 기자인 지은이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찾는 기획을 준비했다. 2005년이니 광복 60주년 때 일이다. 취재차 떠난 북경에서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최용수 교수를 만났다. 최 교수는 중국에서 활약한 조선인 항일운동가를 발굴, 재평가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지은이는 최 교수로부터 이 책의 주인공 김찬을 소개받았다. 김찬은 중국에서는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보다 높게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지은이는 수소문 끝에 김찬의 아들을 찾아 그의 행적을 좇았다.

김찬은 193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활동 및 노동조합운동으로 연일 신문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항일운동가였다. 하지만 활동무대가 조선에서 중국으로 바뀌면서 고국에서는 까맣게 잊혀졌던 인물이다.

2005년 김찬의 삶을 보도했던 지은이는 10년이 지난 광복 70주년에 김찬과 그의 아내 도개손의 짧은 삶을 담아 책으로 냈다. 김찬의 중국인 아내 도개손 또한 항일운동가였다. 국경을 뛰어넘어 결혼을 한 이들 부부는 중국 각지를 넘나들며 항일투쟁을 한 사회주의 혁명가였다. 북경이 일본 관동군에게 점령되면서 부부는 1937년 연안으로 이주했다. 김찬은 중국공산당 간부 양성학교인 섬북공학에, 도개손은 중앙당교 12교에 입학해 전문혁명가의 길을 걷는다. 그런데 그 즈음 모스크바에서는 트로츠키파 숙청 바람이 불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으로까지 이어졌다. 중국공산당에서 최대의 간신이자 대음모가로 알려진 강생이 숙청의 칼을 잡았다.

6개월간의 교육을 받은 김찬 도개손 부부는 1938년 1월 전선으로 가서 항일투쟁에 합류하라는 업무배치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부부가 도착한 곳은 일제와 싸우는 전선이 아니었다. 보안처로 끌려간 부부는 끝내 일제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강생에 의해 처형당한다. 증언에 따르면 이들이 처형당한 이유는 강생의 뜻과는 다르게 당 사업을 계속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1982년에서야 누명을 벗고 복권된다. 지금은 무덤조차 찾을 수 없는 이들 부부의 삶을 기록한 지은이는 이 책이 억울한 죽음, 평가받지 못한 죽음의 제 위치를 잡아주는 ‘역사의 염을 하는 것’과 같은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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