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을 뛰어넘은 지혜로운 집단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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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력이 정부 불신을 잉태한 토양이라면 비밀주의는 국민 불안을 키우는 자양분이다. SNS를 통해 메르스 확진자 발생 병원 리스트가 돌고 있는데도 정부는 비밀주의로 일관하다 방역의 골든타임을 놓쳤다.

도시는 호흡을 멈췄다. 학교는 교문을 굳게 닫았고, 주말 놀이공원엔 인적이 끊겼다. 제철을 만끽해야 할 각종 공연과 문화행사들도 기약 없이 취소되었다. 쇼핑센터는 손님이 줄어 울상이고,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이던 명동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스산한 기운마저 감돈다. 사람들은 마스크로 자신의 입을 가린다. 그리고 정부는 메르스라는 괴질을 둘러싼 괴담을 단속하겠다며 그 입을 아예 다물라고 겁박한다.

각자도생 나선 무능한 정부의 국민들
생기를 잃어버린 이 도시에서 나는 오늘도 시큼한 비타민C 농축 가루 한 봉지를 입에 털어 넣는다. 이게 면역력 강화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나마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궁여지책이라 여기며 이 노란 가루에서 작은 위안을 찾는다. 주말 아침 전국의 휴대전화에 시끄럽게 울려대며 긴급하게 뒷북 친 재난 문자에 찍힌 예방수칙도 잊지 않고 따른다. 수시로 손을 씻는 것은 물론이요, 도무지 식별해낼 방법은 없지만 메르스 증상이 있는 사람과의 접촉만큼은 어떻게든 피해 보리라 다짐한다. 당연히 접할 기회도 없겠지만 대통령이 국빈 예우 차원에서 대접받았다는 그 희귀한 낙타 고기는 아무튼 절대로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각자도생을 도모하며 메르스가 휩쓸고 있는 공포의 여름을 힘겹게 버티고 있다.

각자도생은 무능한 정부에 대한 불신의 반작용이다. 국가적 재난이 닥쳤음에도 정부가 나를 지켜줄 능력이 없음을 직감할 때 국민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찾는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국민들은 정부의 위험관리 시스템에 결코 자신의 생명을 믿고 맡길 수 없음을 이미 학습했다. 그리고 “메르스는 공기 전염이 되지 않는다”고 발표한 보건복지부 장관이 버젓이 마스크를 쓰고 취재진들의 카메라 앞에 등장했을 때, 국민들은 이 정부가 하는 말은 여전히 믿을 게 못 됨을 재차 확인했다. 게다가 다른 어디보다 발 빠르게 설치된 청와대의 열 감지기는 정부 스스로도 각자도생의 길에 나섰음을 몸소 보여준 상징적 퍼포먼스였다. 정부의 위험관리 시스템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아니, 이쯤 되면 그런 건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오직 각자도생만이 이 환난 속에서 유일한 빛이요, 구원이요, 생명의 동아줄이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5월 23일 메르스 확산 방지를 위해 인천공항으로 입국한 카타르 도하발 항공기의 특별 검역 상황을 점검하며 열감지 영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보건복지부 제공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5월 23일 메르스 확산 방지를 위해 인천공항으로 입국한 카타르 도하발 항공기의 특별 검역 상황을 점검하며 열감지 영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보건복지부 제공

무능력이 정부 불신을 잉태한 토양이라면 비밀주의는 국민 불안을 키우는 자양분이다. SNS를 통해 메르스 확진자 발생 병원 리스트가 돌고 있는데도 정부는 비밀주의로 일관하다 방역의 골든타임을 놓쳤다. 세상 사람들이 다 삼성서울병원을 지목하고 있음에도 정부는 서울 D병원이란 비밀스러운 지칭만 고집하다 방역망에 뚫린 엄청난 구멍을 방치했다. 심지어 어느 때보다 신속한 정보 공개와 대국민 소통 창구로 활용되어야 마땅할 질병관리본부 트위터 계정은 이 긴박한 상황에 돌연 문을 닫고 홀로 자가격리 상태에 들어가 버렸다. 불통 정부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드러낸 순간이다. 결국 지금의 사태는 정부의 무능함과 비밀주의가 빚어낸 합작품이다. 무능함이 초기 방역 실패를 초래했고, 비밀주의가 걷잡을 수 없는 메르스 확산을 조장했다.

그래도 국민들은 여전히 지혜로웠다. 그저 제 몸 하나 건사하려는 각자도생은 연대를 통해 위기를 극복해보려는 집단지성의 움직임으로 성큼 진화했다. 감염 환자들이 거쳐 간 지역과 동선을 수집한 메르스 맵이 순식간에 만들어지고, 메르스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스마트폰 앱들도 20개가 넘게 뚝딱 개발되었다. 아마도 정부 눈에는 이것이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키는 괴담의 유포로 보였으리라. 하지만 국민들 입장에서는 바로 그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기 위한 집단지성의 절실한 몸부림이었다. 정부의 시각과 국민들 입장 사이의 간극은 이렇게 많이 벌어져 있다.

무능함과 비밀주의가 빚어낸 합작품
따지고 보면 일부 괴담조차도 정부의 무능함과 비밀주의가 아니었으면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진작부터 정부는 괴담 단속 엄포보다는 온라인을 활용한 메르스 대책 마련에 주력했어야 옳았다. SNS와 스마트폰을 통한 정보의 확산은 바이러스보다 훨씬 빠르고 폭넓기에 메르스 확산 방지에 더없이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특히 온라인 집단지성은 위기상황에서 순발력 있게 대중의 지혜를 모을 수 있다는 데 묘미가 있다. 독감 관련 키워드의 검색 추이를 통해 미국 보건당국보다 먼저 독감 발생 지역을 예측해내는 구글의 독감예측 서비스가 바로 그런 사례이다.

빅데이터도 위험관리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미국 오바마 정부는 제조사와 사용자 간 의약품 판매 정보 공유를 통해 AIDS 등 주요 관리 대상 질병의 분포와 증감 현황 데이터를 수집·분석하는 필박스(Pillbox)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싱가포르 정부도 2004년부터 전염병이나 자연재해뿐 아니라 테러, 금융위기 등 국가 안전을 위협하는 징후들을 데이터를 통해 사전에 예측하고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RAHS(Risk Assessment and Horizon Scanning)라는 위험관리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는 우리 정부가 그토록 질색하는 괴담마저도 위험의 징후를 암시하는 요긴한 데이터로 간주된다.

한국에도 이런 시스템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작년부터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국민건강 주의 알람’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SNS에서 수집한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독감, 눈병, 식중독, 피부병 등 4종의 질병에 대한 위험도를 예측하는 서비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곳에서 메르스는 주요 키워드 항목에 등장조차 하지 않고 있다. 위험예측 시스템이 있어도 정작 위험상황에선 아무 쓰임새가 없으니 이런 시스템은 존재의 이유 자체가 위험한 실정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메르스 사태가 진정되면 틀림없이 정부는 후속 대책 방안이란 걸 만들어 발표할 것이다. 이번엔 또 어떤 기구 개편이 이뤄질지 모르겠다. 세월호 참사를 겪고 국민안전처가 신설됐지만 메르스 사태 속에서 이 기구가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별 내용 없이 요란하기만 했던 긴급 재난 문자뿐이었다. 그 사이 메르스 대책 전담기구가 몇 개씩 급조됐지만 정작 컨트롤타워가 어딘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젠 뭘 해도 미덥지 못한 정부지만 형식적인 기구 개편 따위를 또 후속 대책이라고 내놓는 일만큼은 부디 반복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SNS와 빅데이터를 활용해 위험을 예측하고 집단지성을 통해 위험을 관리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시스템이라도 하나 구축해 놓으라고 권하고 싶다. 역대 그 어느 정부보다도 위험관리 실패 경험을 가장 풍성하게 축적한 정부이기에 그나마 이거라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하는 소리다.

<민경배 경희사이버대학교 모바일융합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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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학대, 나아진 게 없다
오늘을 생각한다
아동학대, 나아진 게 없다
지난 6월 10일 경기 수원시청 앞에서 수원시 장안구의 한 민간어린이집에서 벌어진 집단 아동학대 관련 기자회견을 했다. 비슷한 사건을 접할 때마다 가해자들의 범죄행위에 치를 떨면서, 피해 아동 보호자들이 지친 마음과 몸을 이끌고 기자회견을 하게 만드는 망가진 시스템에 분노한다. 만 2세 반 어린이 13명에게 2명의 교사가 상습 폭력을 가했다. 경찰이 확보한 35일 치 CCTV에서 350건의 학대 행위가 발견됐고, 가해 교사 2명과 원장이 상습 아동학대와 방조 혐의로 검찰에 송치됐다. 그러나 피해 가족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원장은 아무런 행정 처분 없이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고, 가해 교사 2명은 자진 사직했기에 자격정지 등 처분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수원시는 할 수 있는 행정 조치는 다 했다며, 재판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피해 가족들은 수원시 행태가 마치 2차 가해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아동들은 여전히 불안과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자다가 몇 번씩 잠에서 깨는 한 어린이는 “꿀향기반 선생님들이 자기를 데리러 올까봐 무섭다”고 했다. 다른 어린이는 작은 소리에도 몸을 움찔하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 지난 1월 CCTV 영상을 확인하고 경찰 신고, 언론 보도가 이어졌지만 5개월 동안 가족들의 삶은 하루도 편하지 않았다. 만 2세 어린 아기들을 밀치고, 넘어뜨리고, 머리채를 끌어당기고, 냅다 던져버리는 영상을 보며 엄마·아빠들의 마음은 지옥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