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31일은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사회운동가의 기일이었다. 고 권문석 전 알바연대 대변인은 2013년 자택에서 잠을 자던 도중 숨을 거뒀다. 35세를 일기로 아내와 딸 도연이, 그리고 동지들과 200만 알바들을 두고 떠났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지만 어찌어찌 장례위원회를 꾸려 그 해 6월 3일 고인의 영결식을 치렀다. 그리고 2년 뒤 그를 기억하는 동지들은 고인의 유언처럼 남은 ‘최저임금 1만원’ 구호를 걸고 서울 청계천에 모였다.
“한참 소원했지만 어느 때 다시 만나 무슨 일을 도모해야 할지 몰라 동지의 번호를 지우지 못하고 있네요.” 송경동 시인이 ‘그리운 벗’이란 시를 지어 추모 단상에 올렸다. 지난해 1주기 추모제에는 생후 22개월에 불과했던 딸 도연이도 1년이 지나 다시 아빠의 동지들을 만났다. 만년 군소 원외정당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던 사회당 당직자 시절 고인과 함께했던 장애인·인권단체 동료들도 그를 추억했다.
‘최저임금 1만원’ 구호는 고인이 2013년 초 처음 제안했다. 막 만들어진 알바연대라는 단체의 창립 기자회견에서 고인은 200만 알바를 향해 최저임금 투쟁에 나서자고 외쳤다. 명색이 기자회견이었지만 기자들은 오지 않았고 여론은 무관심했다. 알바연대의 ‘최저임금 1만원’ 구호는 노동계에서도 흘려버리는 모양새가 됐다. 하지만 2년 만에 분위기는 반전됐다. 다가오는 6월 말 최저임금위원회의 최저임금 결정을 앞두고 노동계가 공동으로 최저임금 1만원 요구안을 내놓는 등 반향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 권문석 전 알바연대 대변인의 2주기 추모제 장소에 고인의 생전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 알바연대 제공
고인이 조합원들과 함께 조직한 알바노조는 그의 생전 100명 남짓이던 조합원 수가 300명을 넘겼다. 최저임금 인상과 함께 고인이 생전 줄기차게 내건 또 다른 문구 하나는 ‘알바노동자’라는 신조어였다. 아르바이트 학생의 준말로 알바생이라 불리던 단기 계약직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고인은 노동자라는 뒷말을 붙여 부르고 싶어했다. 알바 노동이 더 이상 학생만의 일이 아니라 전 연령대의 누구에게나 닥친 일이 된 세태에 대한 지적도 담겨 있었다.
고인이 남긴 유산 같은 단체 알바연대와 알바노조는 남은 동료들의 손으로 굴러가고 있다. 6월의 최저임금 투쟁은 2주기 추모제의 제목처럼 ‘권문석의 이름으로’ 경영계와 여론을 상대로 진행된다. 고용노동부 산하인 현행 최저임금위를 독립기구로 격상하라는 요구도 나온다. 고인의 생전이나 이후나 일면 급진적인 구호는 여전하지만 유쾌한 운동으로 이어가려는 자세는 변치 않았다. 노동절이었던 5월 1일 DJ를 불러 노동절 행사를 치르는 파격도 고인의 분위기를 빼닮았다.
“당초 고인은 최저임금 1만원을 통해 노동시간 단축이나 일자리 확대와 같이 우리 사회 노동시장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기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구교현 위원장은 고인의 뜻이 단편적인 구호에만 남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섣부른 기획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최저임금 인상의 당위성을 조목조목 설명하던 고인의 뜻이 빛을 볼 수 있을지는 이달 말 최저임금위 테이블에서 결정될 것이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