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지 않는 극우세력의 혐한 시위… 보수진영에서도 “법으로 금지” 목소리
증오에는 국경이 없다. 다만 증오가 국경을 넘어가면 그 대상이 바뀔 뿐이다. 증오의 표현은 말로부터 시작된다. ‘헤이트 스피치’(증오 발언)란 성별?인종?국가?종교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특정한 집단에 대한 증오심을 부추기며 선동하는 행위를 뜻한다. 헤이트 스피치로 몸살을 앓는 것은 세계 곳곳에서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현상이다. 과거 나치 독일이 증오의 대상으로 유태인과 집시를 골랐던 것처럼 현대 일본의 극우세력은 재일 조선인을 지목했다.
“재일 바퀴벌레 조선인을 쫓아내라!”
일본 도쿄 신주쿠구의 신오쿠보 한인 거리는 한류의 ‘성지’ 격인 지역이다. 한류 연예인 및 대중문화 상품은 물론 한국음식점 등 한국 관련 콘텐츠가 집결된 곳이다. 하지만 한류에 관심을 보이는 일본인들만 모이는 것은 아니다. ‘재일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으로 대표되는 혐한 극우세력의 혐한 시위가 가장 격렬하게 벌어졌던 곳 역시 바로 신오쿠보 한인 거리다. 2011년부터 2014년 상반기까지 도쿄의 주일 한국대사관 주변 및 신오쿠보 한인 거리 등지를 중심으로 벌어진 혐한 시위만 해도 349건에 달했다. 평균 4일에 한 번꼴로 줄기차게 시위가 이어진 것이다.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불렀다. 증오에 맞서는 즉각적인 반응은 폭력이었다. 2013년부터는 인종주의와 차별에 반대하는 일본인들의 반혐한 시위도 조직되기 시작했다. ‘레이시스트 시바키타이’(인종주의 타도부대)란 이름을 달고 반혐한 시위에 나선 시위대는 혐한 시위대와의 물리적 충돌도 꺼리지 않았다. “길에서 ‘조선인을 죽여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보고서 냉정한 것이 더 이상하다. 오히려 ‘무슨 헛소리냐’고 외치는 편이 정상적인 반응이 아닌가.” 시바키타이를 이끄는 노마 야스미치(49)는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혐한 시위대를 향한 욕설과 폭력도 자연스런 감정의 발현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도쿄 신주쿠구에서 ‘재일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 회원들이 욱일기 등을 들고 혐한 시위를 벌이자 이를 반대하는 시민들이 ‘인종차별주의 반대’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맞불시위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반혐한 시위대와 물리적 충돌까지
신오쿠보 한인 거리 상점들의 영업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 거리를 찾은 일본인 한류팬들에게도 폭언을 일삼는 혐한 시위대에다, 여기에 맞서 물리적인 충돌까지 벌이는 반혐한 시위대까지 뒤엉키면서 한인 거리는 점차 찾고 싶지 않은 곳으로 전락했다. 주말과 휴일이면 1만명을 훌쩍 넘는 유동인구로 붐비던 좁은 골목들이 한산해졌다. 거리를 찾는 사람들이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자 300개 이상이던 한인 가게 가운데 2014년에만 50여개가 문을 닫았다. 한인 거리를 대표하던 유명 한국음식점 ‘대사관’과 대형 한류상품 백화점 ‘K-Plus’도 예외는 아니었다.
재특회의 ‘헤이트 스피치’가 인종차별이라고 판결한 일본 오사카 고법과 최고재판소의 판결이 지난해 7월과 12월에 잇따라 나오면서 혐한 시위는 줄어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그라진 한류 열기가 다시 지펴지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불안했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간 신오쿠보 한인 거리가 아예 사라져버릴지 몰라 불안해서 모임이라도 결성한 겁니다.” 한국상인연합회의 오영석 회장 말대로 신오쿠보 한인 거리 상인들이 모임은 만들었지만 문제의 근본적 원인인 혐한 기류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을 기세다.
헤이트 스피치 피해는 도쿄를 넘어 확산되고 있다. 재일 한국?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오사카 쓰루하시 등 관서지방 전역에서도 헤이트 스피치를 경험했다는 증언들은 쉽게 들을 수 있다. 일본의 시민단체 ‘휴먼라이츠나우’의 조사 사례를 보면 거의 모든 연령대와 지역에서 헤이트 스피치를 목격?경험했다는 응답이 나왔다.
“중학생 나이쯤 돼 보이는 여학생이 ‘쓰루하시 대학살을 벌일 것이다’라고 확성기에 대고 말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50대 재일동포 남성에게 헤이트 스피치는 “관동대학살이 떠올랐다”고 할 정도로 강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헤이트 스피치가 우익단체의 시위 현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증언도 나왔다. “식당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입에서 헤이트 스피치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한 30대 재일동포 여성은 “종전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해도 조심스럽게 얘기하던 분위기였던 게 이제는 공공연하게 대놓고 표현하는 걸 꺼리지 않게 될 정도로 사회가 변했나 싶었다”고 말했다.
재일 한국?조선인 단체인 재일코리안청년연합이 도쿄?오사카 등 일본 각지의 10~30대 청년층 재일동포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48.8%가 주당 한 차례 이상 헤이트 스피치를 보거나 들었다고 답했다. 인터넷에서 헤이트 스피치를 접한 비율은 더 높아 응답자의 80%가 헤이트 스피치를 경험하고 분노와 공포를 느꼈다고 답했다.
공공연하게 대놓고 하는 증오발언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일본 정치권에서는 아직도 혐한 분위기를 방관하는 기류가 강하다. 일본 사법부가 일본이 1995년 가입한 유엔의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을 들어 재특회의 헤이트 스피치를 인종차별행위로 판단했지만 일본 정부와 의회의 헤이트 스피치 대응은 미적지근하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뒷짐만 지고 있었다. 일본은 1995년 인종차별철폐조약에 가입했지만 지금까지 헤이트 스피치를 막기 위한 법적인 장치를 만들지 않았다.
일본 집권당인 자민당이 지난해 만든 ‘헤이트 스피치 검토 프로젝트팀’은 오히려 한국 내 일본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 실태를 조사해 달라고 일본 정부에 요청했을 정도다. “일본에서 혐한 시위가 일어나는 이유는 한국에서도 (일본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가 심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프로젝트팀의 좌장 히라사와 가쓰에이 중의원 의원의 발언은 일본의 혐한 기류를 한국에서의 반일 감정과 엮어 논란을 무마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보수 진영 일각에서도 “헤이트 스피치는 일본의 국격을 깎아내리는 행동”이라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극우세력의 혐오 조장 선동행위는 법으로 금지시켜야 한다는 목소리 역시 만만찮게 나오고 있다. 각 지방의회를 중심으로 일본 정부에 대해 헤이트 스피치 대책을 마련하라는 의견서를 제출하는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한 달 동안에만 12개 지방의회가 헤이트 스피치 대책 요구 의견서를 가결하는 등 총 15개 지방의회가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일본 경시청 역시 2014년판 ‘치안의 회고와 전망’ 보고서에서 재특회를 처음으로 언급하며 경계가 필요한 단체로 지목했다. 재특회를 “극단적인 민족주의?배외주의적 주장에 기초해 활동하는 우파계 시민단체”로 명기하면서 “향후 위법행위가 우려되는 단체”로 분류한 것이다.
“(재특회의 근간인) 넷우익은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말할 때가 많다. ‘재일 조선인이 일본에서 특권을 쥐고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하면서 지금의 침체된 분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강함’을 선망하는 것이다.” <거리로 나온 넷우익>의 저자 야스다 고이치는 재특회와 우익들의 증오 발언의 배경에는 피해의식과 강자를 향한 동경이 깔려 있다며 증오 발언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게 강경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인터넷 상의 우익을 내버려둔 탓에 조직화가 진행되고 말았다. 규모가 커지고 그들이 사회로 쏟아져나온 뒤에는 사회적 비용과 시간이 더 많이 든다. 나쁜 것은 나쁘다고 분명히 얘기해야 한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