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의 소극적 태도로 법률 발효 반년 넘도록 특별감찰관 임명 못해…
“대통령 친인척·측근 관리 철저히 했으면 이런 일 벌어지지 않았을 것”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정윤회씨의 국정개입 의혹 사건을 계기로 특별감찰관제가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별감찰관제는 대통령 주변 인사들의 비리행위를 감찰하기 위해 올해 처음으로 도입한 제도다. 특별감찰관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하다. 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대검 중수부를 폐지하는 대신 상설특검과 특별감찰관제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특별감찰관법은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해 6월부터 발효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특별감찰관은 아직 임명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제18대 대통령선거일을 이틀 앞둔 2012년 12월 17일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문화의 거리를 찾아 유세 연설을 하고 있다. | 박민규 기자
새누리, 야당 추천인사 공격하며 딴죽
국회에서 특별감찰관 후보를 추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여야 특별감찰관 후보 추천위는 7월 11일 민경한 변호사, 임수빈 변호사, 조균석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 3명의 후보를 추천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민 변호사와 임 변호사를, 새누리당은 조 교수를 추천했다. 야당이 여당보다 더 많은 후보를 추천한 것은 새누리당이 같은 당 소속인 대통령을 감찰하는 특별감찰관 후보를 추천하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치권의 해석이다.
특별감찰관법에 따르면 국회가 3명의 후보자를 추천하면 대통령이 그 중 1명을 특별감찰관으로 지명하고, 국회에서 인사청문회를 거쳐 최종 임명된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새누리당이 추천한 조균석 교수가 후보를 사퇴했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후보 추천과정에서 재산 내역 등 개인기록을 국회에 제출해야 하고 인사청문회까지 통과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 교수가 사퇴하자 새누리당은 추가로 다른 인사를 추천하지 않고 야당 측 추천 인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새누리당은 민경한 변호사가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반부패위원으로 활동했고, 6·4 지방선거에서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으며, 국정원 규탄 시국선언에 참여한 인물이라며 후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새정치연합 박범계 의원은 “민경한 변호사는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반부패특위 위원을 지낸 인물이 맞다”며 “하지만 새누리당이 추천위에서 함께 후보자를 선정할 때는 아무 말이 없다가 이제 와서 문제를 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이 조 교수 대체후보를 추천하지 않으면서 특별감찰관 선임절차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표류하고 있는 특별감찰관제가 정상적으로 시행됐다면 정윤회씨의 국정개입 의혹도 양상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2015년도 새해 예산안이 12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원들의 표결로 통과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 산하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비선실세 의혹’ 논란이 있던 정윤회씨에 대한 감찰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문고리 권력 ‘비서관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이 정씨에게 청와대 동향을 보고하고, 이들이 김기춘 비서실장 교체설도 퍼뜨렸다는 것으로 돼 있다. 사실이라면 국기문란 사건이다. 특히 공직기강비서관실의 정윤회씨 감찰은 정씨가 박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 EG 회장을 미행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시작됐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는 정씨와 박 회장 간의 권력 암투다.
특별감찰관이 있었다면 바로 이런 대통령 주변 사람들에 대한 워치독(감시견) 역할을 하고, 이와 관련된 각종 의혹사건을 조사해 미리 예방할 수 있다. 특별감찰관은 대통령의 배우자 및 4촌 이내 친족, 대통령비서실의 수석비서관 이상 공무원의 비위행위에 대해 감찰할 수 있다.
김기춘까지 보고된 국정농단 감찰 대상
일각에서는 현행 특별감찰관법상 청와대 비서관 ‘3인방’과 정윤회씨에 대한 수사가 불가능하다는 말도 나온다. 정윤회씨는 대통령의 배우자도, 4촌 이내 친족도 아닌 민간인이고, ‘3인방’은 수석비서관이 아니어서 감찰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보고서가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통해 김기춘 비서실장에게까지 올라간 만큼 민정수석과 김 실장을 조사할 수 있고, 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3인방’과 정씨의 국정농단 혐의가 포착되면 이들을 조사하는 게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새정치연합 전해철 의원은 “이 사건의 본질은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작성한 비선측근들의 국정농단 내용이 담긴 보고서가 김기춘 실장에게까지 보고가 됐다는 것”이라며 “최근에 정씨와 관련한 인사청탁 의혹 등이 불거져 나오고 있는 만큼 이런 부분은 감찰 대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별감찰관이 일찌감치 임명돼 대통령 주변에 대한 워치독 역할을 강화했더라면 정윤회씨의 국정개입 의혹도, 청와대 내부의 권력 암투도 이 정도까지 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후보 추천이라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고, 박 대통령도 자신이 약속했던 특별감찰관 임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 사이 대통령 주변은 비선 간의 암투, 청와대 내부의 견제와 대립, 정씨의 국정농단 의혹으로 곪아가고 있었다.
특별감찰관 같은 워치독 역할을 하는 사람도, 조직도 없었던 게 청와대의 불행이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