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1일 파텍 필립(Patek Philippe)은 세계 시계 경매 역사를 새로 썼다. 이들이 1933년 제작한 헨리 그레이브스 슈퍼컴플리케이션 회중시계가 소더비 경매에서 역대 최고가인 2323만7000 스위스프랑(약 264억원)에 낙찰된 것이다. 아무리 경매의 제왕인 파텍 필립이라지만 이 시계는 대체 뭐가 그리도 특별하기에 이토록 높은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일까? 수십년 전에 제작된, 누군가에게는 그저 골동품에 지나지 않을 시계가 어떻게 서울 강남의 빌딩 한 채 값이나 나갈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사실 누구도 명확하게 내릴 수 없다. 최고급 시계를 포함한 희소성 높은 소위 명품의 가치는 여느 소비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파텍 필립의 시계는 적어도 시계 애호가 및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그 이름만으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앞서 연재를 통해 우리는 파텍 필립을 대표하는 클래식 정장 시계인 칼라트라바와 브랜드 최초의 스포츠 시계인 노틸러스를 다룬 바 있다. 이번 연재에서는 파텍 필립의 정수 중의 정수이자 가장 복잡한 시계만을 선보이는 컴플리케이션과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컬렉션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11일 소더비 경매에서 세계 시계 경매 역사상 최고가를 경신한 헨리 그레이브스 슈퍼컴플리케이션
900여개 부품으로 24개 복잡기능 표현
1839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동한 파텍 필립의 장기는 다양한 기능을 갖춘 복잡 시계, 이른바 컴플리케이션 및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시계 제조에 있었다.
파텍 필립은 1898년 최초로 퍼페추얼 캘린더 기능을 갖춘 회중시계를 개발한다. 그리고 1925년에는 손목시계 형태의 첫 퍼페추얼 캘린더 모델을 발표한다. 이후 1933년, 당시 미국 뉴욕에서 활동한 거부 은행가이자 열렬한 시계수집가인 헨리 그레이브스 주니어의 주문 의뢰로 약 5년간의 개발 끝에 그의 이름을 딴 전례 없는 회중시계 하나가 등장한다. 서두에 언급한 바로 그 헨리 그레이브스 슈퍼컴플리케이션 회중시계가 그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헨리 그레이브스 슈퍼컴플리케이션은 18k 골드 케이스로 제작되었으며 사용된 부품 수만도 총 900여개에 요일, 날짜, 월, 4년마다 한 번씩 다가오는 윤년까지 자동으로 맞춰주는 퍼페추얼 캘린더와 문페이즈,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 밤하늘 별자리와 일출, 일몰, 균시차, 나아가 5개의 해머와 공이 만들어내는 풍부한 멜로디가 일품인 웨스터민스터 카리용과 그랑 & 프티 소네리까지 총 24개의 복잡 기능이 망라되었다. 훗날 그 이름에 일반적인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이 아닌 슈퍼컴플리케이션이라고 칭해진 것도 이러한 태생적인 특별함 때문이었다.
이후 1941년 파텍 필립은 퍼페추얼 캘린더와 크로노그래프를 접목한 첫 손목시계(Ref. 1518)를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1950년대 들어서는 컴플리케이션 손목시계 시리즈로 이미 수많은 마니아층을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의 대표작 중 1951년 제조된 핑크 골드 케이스의 퍼페추얼 캘린더 크로노그래프 모델(Ref. 2499)은 지난 11월 9일 제네바에서 열린 파텍 필립 175주년 기념 크리스티 특별 테마 경매에도 출품돼 262만9000 스위스프랑(약 29억5000만원)에 낙찰됐을 만큼 시대를 초월한 가치를 현재까지도 인정받고 있다. 그 외에도 당시 파텍 필립의 인기 모델 중 하나였던 다양한 종류의 월드타이머와 퍼페추얼 캘린더, 그 종류 및 수는 매우 적지만 그만큼 가치가 높은 투르비용 모델 등이 1950~1960년대 파텍 필립의 최고급 시계 라인 목록을 채웠다. 한편 1960년대 초반부터 파텍 필립은 기존의 핸드 와인딩(수동) 방식이 아닌 오토매틱(자동) 방식으로 작동하는 퍼페추얼 캘린더 모델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올해 창립 175주년을 기념해 발표한 그랜드마스터 차임
시계를 뛰어넘는 장인정신 깃든 예술
시계업계 전반이 쿼츠 위기로 암흑기나 다름없었던 1970년대에서 1990년대 사이에도 파텍 필립의 컴플리케이션 및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시계를 찾는 수요는 오히려 크게 증가했다. 파텍 필립에 충성도가 높은 기존 고객들이나 잠재고객들은 이미 그 시절에도 파텍 필립을 단지 시계로서의 효용성 때문에 선택하는 게 아니라 고유의 예술성과 장인정신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할 줄 알았던 것이다. 특히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의 생산목록 중에서 퍼페추얼 캘린더와 문페이즈, 크로노그래프를 결합한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손목시계는 매년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 중 1987년 플래티넘 케이스로 제작된 모델(Ref. 2499)은 단 2개만 만들어졌고 하나는 파텍 필립 뮤지엄에 영구 소장, 다른 하나는 1989년 공개 경매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가 몇몇 소유주를 거쳐 수년 후 미국 출신의 세계적인 뮤지션 애릭 클랩튼의 손에 들어간다. 이 시계는 다시 2012년 11월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돼 340만 프랑(당시 환율 기준 약 40억원)에 낙찰돼 세계를 놀라게 했다.
뿐만 아니라 창립 150주년을 맞은 1989년 파텍 필립은 칼리버 89라는 브랜드 역사상 가장 복잡한 기능을 자랑하는 한 회중시계를 선보인다. 제작기간만 무려 10여년이 소요됐으며, 퍼페추얼 캘린더, 그랑 & 프티 소네리,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 등 총 33가지 컴플리케이션을 응축한, 앞서 1930년대 제작된 헨리 그레이브스와 마찬가지로 슈퍼컴플리케이션에 해당하는 시계였다. 이 시계는 그해 옐로 골드 모델이 앤티쿼룸 경매에 출품돼 450만 스위스프랑(약 50억원)이라는 역시 기록적인 금액에 낙찰돼 당시 최고가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175주년을 맞은 파텍 필립은 또 하나의 놀라운 걸작인 그랜드마스터 차임(Grandmaster Chime)을 공개한다. 파텍 필립의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손목시계로는 최초로 리버서블, 즉 케이스 본체를 돌려 앞뒤 전복이 가능하며, 부품수 총 1366개에 그랑 소네리와 프티 소네리, 미닛 리피터, 퍼페추얼 캘린더 등 무려 20가지 컴플리케이션 기능을 응축해 놀라움을 안겨줬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파텍 필립은 지름 47㎜ 로즈 골드 케이스에 월계수 잎을 형상화한 음각을 베젤 및 케이스 측면에까지 정성스럽게 수공으로 새겨넣어 시계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하나의 수공예품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수준을 과시해 보였다.
이렇듯 지난 175년간 파텍 필립은 한 번도 지름길을 선택한 적이 없다. 자신들이 목표하는 최고급 시계를 위해서라면 끊임없이 한계에 도전하고 열정을 담금질했다. 그렇게 묵묵히 험난한 길을 걸어온 결과 파텍 필립은 현 시계업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브랜드로 군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이들의 컴플리케이션과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컬렉션의 시계들은 하나의 시계가 어떻게 하면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를 그 존재만으로도 저절로 수긍할 수 있게 한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는 시계, 기술적으로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완벽에 가까운 시계, 바로 파텍 필립이 지향하는 궁극의 경지이자 세계 시계 애호가들이 파텍 필립에 한결같은 애정과 기대를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세훈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