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버리고 녹색세상에 투신한 하승수
그는 버스와 기차를 타고 365일 전국을 누빈다. 강연을 하고 신문에 칼럼을 써 차비를 벌어 쓰고, 농촌대안학교인 충남 홍성 풀무학교에서 강의한다. 월급은 학생들이 농사지은 쌀과 농산물이다. 아버지가 묻는다. “너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
부안, 강정, 밀양…. 생명이 죽어가는 곳이면 어디든 하승수가 먼저 가 있다. 그는 촌사람처럼 계산 없이 웃고, 촌사람처럼 먹고 입는다. 전직 변호사, 전직 법대 교수…. 부모님이 원했던 직업 앞에는 ‘전직’이라는 수식어만 남아 있다. 운동화를 신고, 백팩을 짊어지고, 버스와 기차를 타고 365일 전국을 누빈다. 월급 없는 사람으로 사는 동안 걸음은 빨라졌고, 운동화는 더 빨리 닳았다. 걸려오는 전화가 많아서 휴대전화 배터리도 금세 닳는다. 하지만 닳지 않는 이 사람의 에너지는 ‘돈보다 생명’을 찾아서 오늘도 길을 나서게 한다.
세월호 이후 마음 둘 곳 없는 시민들을 찾아가야 하고, 방사능·탈핵·농업·먹거리·노동·소수자 인권·동물권·평화 등의 의제를 매개로 사람들을 모아서 토론을 해야 하며, 작은 모임들을 만들어 나가려면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은 너무 짧은 시간이다. 하승수는 꼼꼼한 사람이다. 문제를 발견하면 반드시 파고들고 대안을 제시한다. 지금의 세상과는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마을’이라고 확신한다.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살 수 있는 곳은 오직 마을이므로, 마을의 경제·교육·환경·문화를 살려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마하트마’의 뜻은 ‘위대한 영혼’이다. 하승수를 만나면 마하트마 간디의 청년시절이 떠오른다. 변호사였던 간디는 현장에서 뛰는 활동가가 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을 조직하고 이끌었다. 하승수의 뒤를 따라 걸어보면 그가 간디의 삶을 한국에서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하트마 하승수’라고 불러주고 싶지만, 아마 그는 얼굴을 붉히며 내게 진심으로 화낼 것이다.
공인회계사로 일하다가 사법시험에 합격하다
대구에서 태어났고, 부산에서 자랐다. 학창시절엔 공부만 했다. 말이 없었고, 혼자 역사책을 읽는 시간이 가장 좋았다.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순종 잘하는’ 소년이었다.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몇 번 반장을 떠맡았지만 리더십은 없었다. 봉사활동에 대한 특별한 기억은 없다. 대도시에서만 살았으므로 농촌에 대한 기억 또한 없다. ‘공부 잘하는 하승수’는 어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생이 되었다. 80년대 후반이니 누구나 하듯이 학생운동을 했다. 전면에 나선 적은 없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사회에 대한 관심이 싹텄으나 제도권을 선택했다. 제도권 안에서 내 역할을 하고 싶었다. 공인회계사가 되고 법인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부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측면이 많았다. 더 폭넓은 일을 하고 싶었다. 사법시험을 준비했고 3년 후에 합격했다. 판사를 하고 싶었다. 사법연수원에 들어갔으나 경영학과 출신인지라 인맥이 없었다. 늘 답답했다. 연수원 내에 잡지를 만드는 편집부에 들어가서 취재를 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인생을 통째로 바꾼 사건 - 참여연대에서 만난 억울한 민초들
“시민단체를 취재하고 기사 쓰는 걸 맡았어요. 마침 친구가 참여연대에서 일하던 시기라서 취재를 나갔죠. 박원순 변호사님이 1996년 당시 사무처장이었어요. 그분은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일에 대한 몰입도가 매우 높고 실천력이 강한 분이셨어요. 당시엔 우리의 롤모델이었죠. 일할 사람이 없던 시기에 연수원 후배들이 취재를 나가니까 없는 돈을 빌려와서 국밥을 사주며 도움을 요청하셨어요. 그땐 전국에 억울한 사람들이 참여연대로 찾아왔거든요. 마지막으로 도움을 청하러 오는 곳이었어요. 그 사람들을 상담하는 일을 맡아야만 했어요. 동기 20명을 모아서 자원봉사를 시작했죠. 나는 복지시설 자원봉사도 안 해봤던 사람인데 사람들을 만나보니까 기가 막혀요. 몰랐던 한국 사회의 이면을 너무 많이 봤어요. 미치겠더라고요. 결핵 환자촌이 서대문시립병원 뒤에 있는데, 거기 교회가 있어요. 교회가 후원금을 받아서 환자들을 돌봐야 하는데, 본분은 망각하고 하나의 권력이 돼서 환자들 위에 군림하는 거예요. 환자들을 법률적으로 도와주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찾아가서 만나고 발로 뛰어다녔죠. 어떤 사람은 87년에 시위에 딱 한 번 참여했다가 경찰에 붙잡혀서 구류를 살았는데, 그 후로 10년간 사찰을 당해온 거예요. 경찰이 계속 집에 찾아오고 회사도 못 다니고요. 우리가 대리소송을 해주고 승소했죠. 사법 피해자 모임을 만들고, 억울한 사람들을 만나서 돕다보니까 소문이 나고… 쉴 틈이 없었어요. 억울한 사람은 넘쳐나고 도울 수 있는 법률가는 부족한 현장 한복판에 제가 들어가게 된 거죠. 참여연대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어야 해!”(웃음)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때 판사가 될까, 검사가 될까 고민했다. 하지만 하승수는 이미 ‘문제 인물’로 낙인 찍혀 있었다. 성적은 좋았으나 누구도 판·검사를 권하는 사람이 없었다. 민변 선배들 사무실에 들어가서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상근으로 일하다가, 비상근으로 일하면서 참여연대 일을 계속 도왔다. 늘 마음이 참여연대에 가 있었다. 1년 정도는 개인 사무실을 열기도 했다. 돈도 꽤 벌었으나 변호사 업계에 적응을 못했다. 오로지 시민운동만 하고 싶었다. 2004년 1월에 모든 걸 그만두고 백수가 됐다. 내가 무엇을 할지 쉬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2004년, 절규하는 부안이 하승수를 부르다 - 인생의 두 번째 변화
농업·환경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은 없었다. 겉모습은 촌사람 같아도, 순수한 도시사람으로만 살았다. 어려서부터 인권문제에는 관심이 많았으나, 핵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백수가 된 지 10일차 되던 날, 갑자기 부안에서 연락이 왔다.
“그때 부안에 안 갔어야 해!(웃음) 2004년 1월 3일에 부안주민대책위와 환경운동연합에서 저를 보자고 찾아왔었어요. 2003년 7월부터 부안 핵폐기장 문제가 시작됐는데, 마지막 수단으로 주민투표를 해보자는 거였어요. 제가 지방자치에 관심을 두고 주민투표 제도에 대해 공부를 해왔던 터라 저한테 요청이 온 거죠. 언론을 통해서 부안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또 주민투표를 한국에서 제대로 한 번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주민투표관리위원회 사무처장을 수락했어요. 철저한 민간 차원의 주민투표였어요. 투표함, 투표용지, 투표를 위한 주민명부 등 모든 걸 우리가 준비했어요. 컴퓨터도 준비가 안 된 상황이어서 PC방에 앉아서 문건을 작성했죠. 13개 읍·면을 돌면서 토론회를 열고, 시골 마을을 속속들이 경험했어요. 다행히 전국의 시민단체들이 활동가를 파견해줬고, 부안 주민들이 헌신적으로 주민투표 준비에 참여해준 덕에 투표율 72%에 방폐장 반대가 92% 넘게 나왔습니다. 정부와 군수가 방해를 계속했지만 성공한 주민투표의 사례가 되었죠. 정부가 부안 앞바다의 위도에 설치하려고 했던 핵폐기장 건설 백지화는 부안 사람들이 만들어낸 기적이었어요.”
부안에서 지내는 동안 농촌에서 대안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농촌·농업 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농촌과 농업에 관심을 가지고, 농촌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당한 일들을 바로잡는 데 앞장서는 법률가들이 많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주민토론회를 할 때는 마이크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마을을 지키고 싶다”고 호소하는 열두 살 소년도 만났다. 마을을 사랑하고 농촌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정책과 정치가 마을을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다. 귀촌해서 마을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법대 교수가 되어 제주도로 가다
부안에서 돌아온 뒤 다시 변호사 일을 하면서 귀촌 장소를 찾고 있었다. 그때 제주도에서 연락이 왔다. 제주대학교 법대 교수 초빙 제안이 온 것이다. 교수라는 직함보다 ‘제주도’라는 지역의 매력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귀촌하고 싶은 곳으로 늘 염두에 두고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2006년, 제주로 내려가서 2년 동안은 몸도 마음도 편하게 지냈다. 정치적 상황도 정신도 몸도 가장 편안한 시기였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4대강 사업이 시작되었다. 대학은 로스쿨이 생기면서 마치 거대한 학원처럼 변모했다. 교수라는 직업에 대한 회의가 생겼다. 사실 많은 걸 누릴 수 있는 직업이었고, 조용히 공부하는 걸 가장 좋아하는 성격상 가장 적합한 직업이었다. 가족들에게도 안정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내가 가르치는 지식이 그들의 인생에 큰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소장을 2008년에 만들고, 소장을 맡아서 서울과 제주도를 왕래하며 일을 했다. 시국상황은 날마다 나빠졌고, 더 이상 제주도에 안주해 있을 수가 없었다. 시민운동에 집중해 보자,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사회운동을 본격적으로 해 보자는 결심을 굳혔다.
“장기간 백수가 되겠다고 선포를 한 거지요. 그때도 제 아내는 동의해줬어요. 참여연대 일을 시작하고, 민변 사무실에 들어갈 때에도, 개인 사무실을 그만둘 때에도 아내는 단 한 번도 반대하지 않았어요. 부와 권력에 관심이 없고 저를 무조건 믿어주는 사람입니다. 저는 아마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틀림없어요.(웃음) 2010년에 서울로 돌아왔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거죠.”
하승수와 제주도의 인연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강정 해군기지 문제가 생겼을 때 제주는 다시 하승수를 부른다. 제주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강경한 발언을 하고 글 쓸 수 있었다.
우리도 독일처럼 녹색당이 필요하다
부안에서 환경문제에 눈을 떴고, 제주에서 생태환경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2011년 3월, 또 한 번 인생의 전환점을 찍는 사건이 터졌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뉴스만 봤다. 원자력의 위험성에 대한 좌담을 녹색평론에서 읽게 되었다. 아주 상세했다. 그래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도무지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경주 방폐장 문제도 그 당시에 겹쳐서 일어났다. 그때 우리도 독일처럼 녹색당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고, 강력히 동의했다. 독일은 5만명이 모여서 탈핵을 이루어냈다. 우리나라는 1만명을 모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원전을 멈추려면 국민투표를 하거나 선거를 통해야 해요. 시민운동만으로는 불가능해요. 국민투표도 논란이 많죠. 그래서 독일처럼 대안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몇 사람 모여서 얘기하다가 내가 나섰어요. 나는 리더십이 없는 사람이고, 지금도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한 내성적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안 나설 수 없는 일이 계속 생기니 어쩔 수 없는 거죠. 녹색당 강령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우리는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과 낙관을 잃지 않으며, 비폭력과 평화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이건 제 인생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녹색당은 2011년 7월, 이렇게 시작됐다. 그는 지금 공동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
“작지만 다양한 모임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 돌 전후의 아기들을 데리고 엄마들이 10여명 모여서 세월호에 대해 얘기하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모임에 초대받아서 갔었는데요, 이런 모임들이 많아지는 것이 시민사회가 활성화되는 겁니다. 시민단체나 정당운동은 마당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마당의 주인은 ‘분노한 시민’이어야 하는 거죠.”
“만약 간디가 지금의 대한민국에 있다면, 그리고 밀양 주민들의 호소를 듣는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변호사 출신인 간디는 잘못된 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하는 시민 불복종운동을 벌였던 사람이에요. 자신도 수없이 감옥을 드나들었죠. 뜻을 같이하던 변호사들은 생계를 팽개치고 시민 불복종을 실천했어요. 곤혹스럽게도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은 정당하지 못한 국책사업을 견제하지 못합니다. 주민들의 호소와 정의의 관념에 냉담하고, 권력과 자본의 편만 듭니다. 대부분 검사·판사들은 진실을 파헤칠 의지가 없고 정부의 잘못을 지적할 용기는 더욱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잘못을 보고도 ‘합법’의 틀 내에서 머물러야 하는가, 아니면 시민 불복종을 해야 하는가? 분명한 점은 지금 벌어지는 불의에 침묵하면서 ‘정의’를 논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월급날은 ‘쌀 떨어지는 날’, 월급은 농산물
강연을 하고 신문에 칼럼을 쓰면서 차비를 벌어 쓰고, 농촌대안학교인 충남 홍성 풀무학교에서 강의한다. 월급날은 ‘쌀 떨어지는 날’이고 월급은 학생들이 농사 지은 쌀과 농산물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핵 마피아>에 배우로도 출연 중이어서 요즘 더 바빠졌다. 아침 9시부터 영화 촬영, 2시 에너지 기후정책 연구소 좌담에 참여, 4시부터 인터뷰 시작….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한 그에게 밥을 사고 싶었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계속 전화기가 울렸다. 석면 폐기장 문제로 상담을 요청하는 전화가 여러 번 걸려왔다. 저녁에 마포에 가서 회의를 끝내고 홍성에 가서 상담을 해주기로 약속이 정해졌다. 결국 밥은 먹지 못했고, 우리는 지하철역까지 경보를 하듯 빨리 걸어야 했다. 우리가 나눈 마지막 대화는 이렇다.
“원래 성격이 공감 능력이 뛰어나죠? 남의 부탁 거절 못하고….”
“어쩌다가 현장 속으로 들어와서 일하다보니 없던 공감 능력이 생겨났어요. 사람은 나이 들어도 변해요. 어떤 사람들과 어떤 생각을 나누면서 일하느냐에 따라서 공감 능력은 끊임없이 계발돼요. 공감하니까 거절도 못하죠.”
“부모님께서는 변호사, 교수 다 그만둔 아들에게 뭐라고 하시나요?”
“그게 제일 죄송해요. 이번 추석에도 내려가니까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 하시며 속상해 하셨어요.”
하승수란 사람은 늘 웃는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하회탈처럼 계속 웃었다. 그런 그가, 부모님 얘기를 꺼내자 잠시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걸음도 느려졌다.
“언제까지라도, 이렇게 살아주세요. ‘마하트마’ 하승수!”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손사래를 치며 지하철에 오르는 그의 등에 매달려 있는 가방이 무척 무거워 보였다. 누가 저 짐을 좀 나누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승수 1968년생.
전 변호사, 전 대학교수, 전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소장, 공동육아 ‘어깨동무 어린이집’ 이사장,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 전 부안방폐장유치 찬반주민투표관리위원회 위원장, 현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글·사진 박상미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