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생명보다 더 우선하는 ‘민생’은 없다. 세월호 속에 갇힌 채 수장된 304명의 생명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민생이 따로 있단 말인가.
세월호에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그 어느 해보다 쓸쓸한 추석을 맞았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들에게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참혹한 명절이었을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위해 제사상을 차리는 그 부모의 심경을 어디에 비교할 수 있으랴. 가슴에 대못처럼 박힌 아픔이 아물기도 전에 지금 그들의 슬픔은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딸을 잃고 46일째 곡기를 끊었던 아비의 슬픔은 사생활까지 들춰지며 훼손되고, 거리에서 밥을 굶는 유족들은 곁에서 보라는 듯이 닭과 피자를 게걸스럽게 먹는 무리들에 의해 모욕을 당했다. 일부 지각없는 이들의 행태야 그렇다 치더라도, 유족들에게 “언제든 찾아오라”던 대통령은 꿩 구워 먹듯 자신의 말을 집어삼킨 채 아직도 유족들을 만나주지 않고 있다. 국가적 재난에 대해 실질적인 책임을 통감하며, 최선을 다하여 세월호 참사의 모든 것을 밝히겠다던 정부와 여당은 기회 있을 때마다 ‘민생’을 입에 달고 나섰다. 당면한 경제난국의 모든 책임이 청운동 사무소 앞에서 풍찬노숙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의 유족들 탓으로 여겨질 정도다.
지난 9월 3일 CBS 방송에 출연한 세월호 대책위 유경근 대변인의 말에 따르자면, 집권여당의 김재원 수석은 “전혀 양보할 것이 없으며, 더 줄 것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고, 이완구 대표는 세월호 유족들의 배후에 특정 단체나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흘리며 유족들 사이에도 서로 의견이 달라 분열이 일어난 것처럼 주제넘은 걱정까지 챙기고 나섰다 한다. 어느 여당 국회의원은 김영오씨의 주치의에 대해 신원확인까지 요청하였다 하니, 이것이 과연 세월호 참사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며 최선을 다해 수습에 힘쓰겠다던 정부와 여당의 본색인지 심히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염소 뿔을 녹용이라고 속여 파는 저잣거리 야바위꾼이라면 몰라도, 국정의 수반인 대통령이 눈물까지 섞어가며 약속한 자신의 말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잡아떼고, 궁지에 몰렸을 때는 납작 엎드려 국민들 앞에 사죄하던 정부와 여당 인사들의 표변은 정치의 책략을 넘어 인간적 모멸감마저 느끼게 한다.
눈물의 사과를 했던 대통령은 어디에
이제 스스로 국민과 유족들 앞에서 세월호 참사의 최종 책임자임을 자인하고 눈물의 사과를 했던 대통령이 어째서 유족들을 만나주지 않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멀리서 찾아온 교종까지 잡아주던 유족들의 손을 그 나라의 대통령이 만나주지조차 않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유족들의 요구를 들어줄 자신이 없어서인가. 그럴수록 유족들을 만나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보고,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여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 수순이다.
유족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을 벌이고, 청운동 거리에서 비를 맞으며 비닐을 덮은 채 밤을 새우는 동안 대통령은 어디에서 어떤 ‘민생’을 챙기고 있었을까. 대통령이 생각하는 ‘민생’은 시장을 둘러보며 멸치나 감자를 집어드는 것인가.
국민의 생명보다 더 우선하는 ‘민생’은 없다. 세월호 속에 갇힌 채 수장된 304명의 생명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민생이 따로 있단 말인가. 어찌 그 입에서 ‘민생’이 그리 쉽게 나올 수 있는지 참담하기만 하다. 시쳇말로 죽은 사람은 어쩔 수 없고,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인가. 그런 생각에서 나온 ‘민생’이라면 이제 세월호라면 지겹다며 그만 좀 하자는 일부 세간의 주장과, 장사가 안 된다며 세월호 현수막을 찢어버린 어느 몰지각한 장사꾼의 행태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백 번 양보하여 설령 나라의 경제가 국민의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쳐도, 경제가 어려운 것이 어찌 세월호의 희생자와 유족들 탓이겠는가. 이미 지난 일이니 이제 좀 덮어두고 돈이나 벌자는 생각이라면 남의 상가에 가서 양초나 팔려는 시정잡배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천하엔 두 개의 큰 기준이 있으니, 하나는 옳고 그름(是非)의 기준이고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利害)의 기준이다. 이 두 가지 기준에서 네 단계의 큰 등급이 나온다. 옳은 것을 지키면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고,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키면서 해를 입는 등급이고, 그 다음은 옳지 않은 것을 추종하여 이익을 얻는 경우이고, 가장 낮은 등급은 옳지 않은 것을 추종하여 해를 입는 경우이다.”
다산 정약용의 말씀이다. 경제를 위해 세월호 같은 슬픔은 잊어버리자고 말하는 이라면, 결국 ‘옳지 않은 것을 추종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무리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이 나라는 지금 시정잡배와 야바위꾼에게 맡겨진 셈이 되는 것이다.
대통령은 어떤 민생을 챙기고 있는가
국민의 생명과 안위를 보장하지 못하는 나라와 대통령이라면 언제든 그러한 참사가 재연될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되고 말 것이다. 회복될 수 없는 세월호 참사의 최종 책임을 통감하는 대통령이라면 그리 쉽게 ‘민생’을 내세워 유족들과 국가 부재의 허탈감에 빠진 국민들을 겁박해서는 안 된다.
세월호에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바라는 바는 지극히 소박하다. 사랑하는 자식과 가족이 어떻게 희생되었는가를 알고 싶다는 것이다. 어떻게 세월호가 침몰했으며, 수습하는 과정에서 어떤 과오가 있었는지를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것은 국가와 대통령의 필수적인 책무이며 최소한의 배려이다.
국가와 정부는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해 미필적 고의에 의한 가해자에 해당된다. ‘피해자가 조사를 담당할 수 없다’며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대한 유족들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가해자가 조사를 담당할 수 없다’는 반문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진정 민생을 걱정하는 이들이라면, 정략적 이해를 따지기 전에 그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만 살겠다고 속옷 차림으로 배를 버리고 달아난 세월호 선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시백(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