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고, 축축하고, 무기력했던 여름도 어느새 가고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게 가을이 오고 있음을 실감케 합니다. 38년 만의 이른 추석이라고 해도 추석은 추석인가 봅니다. 올해도 어김이 없습니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한들거리고, 잠자리는 날아다니고, 밤은 입을 벌리고, 으름은 으슥한 곳에서 달콤하게 익어갈 것입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벌초를 하고, 차례상 앞에 빙 둘러앉아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즐거운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마음은 벌써 고향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뒤에서 뭔가가 자꾸 잡아당깁니다. 찜찜하고 미안한 느낌도 떨쳐내기 힘듭니다.
유민 아빠 때문입니다. 광화문 농성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이 눈에 밟히기 때문입니다.
46일 동안 단식 농성을 이어온 유민 아빠는 다행히 지난 8월 28일 단식을 중단했습니다. 그의 단식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자식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의미라도 만들어주려는 아빠의 몸부림이고 사랑일 것입니다. 살이 다 빠져나가 앙상해진 그가 마치 죽음을 향해 초연히 걸어가는 것 같아 두렵고, 떨리고, 안타깝고,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단식을 중단해 마음이 놓입니다.
유민 아빠가 스스로 단식을 중단하는 걸 보면서 새삼 박근혜 대통령이 참으로 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시간을 놓치면 유민 아빠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제발 그런 끔찍한 상황은 막아야 한다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을 때도 대통령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가족들이 한 번만 만나달라고 그렇게 애원하는데도 청와대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찌 그리 모질 수 있는지 대통령이 무서워집니다.
유민 아빠가 46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을 했어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정부·여당과 유가족들의 입장차는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고, 대통령은 새누리당 뒤에 숨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자화상입니다.
유가족들이 특별한 걸 요구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5월 16일 희생자 가족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상규명) 특별법은 물론, 특검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투명하게 그 과정을 공개하고, 그 과정에서 여러분의 의견이 항상 반영될 수 있도록 하겠다. (…) 무엇보다도 진상 규명에 있어서 유족 여러분들의 여한이 남지 않도록 하는 것, 거기에서부터 깊은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하지 않겠느냐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의 말, 약속이 유가족들이 요구하는 그것과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대통령 말대로만 하면 됩니다. 유가족이 과도한 걸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니라 대통령이 자신이 뱉은 말조차 지키지 않는 데서 건널 수 없는 강이,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 강 위에 세월호 괴담과 유언비어, 저주가 무차별적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의사자 지정해달라니, 말이 돼?”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고, 천안함과 비교할 수도 없지”라며 유가족들을 비난하는 말들도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진실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매미를 잡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 사마귀는 등 뒤에서 자신을 노리는 까치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세월호 특별법은 정쟁거리가 아닙니다. 한풀이 수단도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두 번 다시 세월호 같은 참사를 겪지 않도록 철저히 진상을 규명하고, 시스템을 점검·개혁하고,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게 수사권과 기소권입니다. 국민들에게 손해날 것이 하나도 없지요. 그런데도 세월호 특별법 얘기만 나오면 경기 들리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 국민들인지 모르겠습니다.
고향 가는 발걸음이 영 개운치가 않습니다. 추석날 보름달을 보면서 먼저 간 자식들을 떠올리며 눈물 흘릴 유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립니다. 마음만이라도 광화문의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우리이고, 우리가 곧 그들이니까요.
<류형열 편집장 rh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