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청와대에서 목격한 ‘세월호 이후’ 대한민국
“많은 분들이 추석이 다가오는 것을 걱정해 주십니다. 작년의 추석처럼 올해의 추석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과 걱정해준 친척들과 차례 음식 나누며 조용히 지내고 싶기도 합니다. 특별법을 제정해놓고, 우리 가족들이 모두 진도의 실종자 가족들을 만나러 가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에, 청와대의 응답을 듣기 전에 여기를 떠나지는 못하겠습니다. 특별법은 진실과 안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알며 여기까지 왔는데 시작도 못하고 떠날 수는 없지 않습니까.”
8월 29일 오후 3시.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매일 오후 3시에는 어김없이 이곳에서 유족들의 입장발표 기자회견이 열린다. 농성 8일차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기약 없는 싸움이다. 농성 이틀째이던 8월 23일 새벽 비가 내렸다. 유족들은 뜬 눈으로 날을 샜다. 비닐을 이불 삼아 돌돌 몸에 말고 동사무소 주차장 바닥에 누웠다. “그때 진짜 울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참담했죠.” 8월 28일 밤 늦은 시간, 농성장에서 만난 김종기씨(50)의 말이다. 2학년 1반 고 수진양의 아버지다.
대답 없는 ‘대통령 면담’ 기약 없는 농성
기자는 8월 26일부터 3일간 이곳 청와대 앞 유가족 농성장을 방문해 취재했다. 3일 내내 농성장 방문은 자유롭지 않았다. 주민센터에서 청와대 쪽으로 가는 길은 항상 경찰버스로 막혀 있었다. 사람 한 명 통과할 수 없다. 그나마 기자가 방문한 8월 26일부터는 주민센터 정문 앞쪽은 폴리스라인이라고 적힌 노란색 플라스틱 펜스가 쳐져 있었다. 펜스와 경찰버스 차벽 사이에는 의경들이 지키고 있다. 의경들은 “취재 목적으로 들어가겠다”고 밝혀도 “기자증을 제시하기 전에는 못 들어간다”고 제지했다. ‘근거’를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위에서 시킨 일이라서…. 우리로선 어쩔 수 없습니다.”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의 언론지원 활동을 하고 있는 인권운동가 미류씨가 검문을 피해 펜스 밑으로 해서 농성장 안으로 들어왔다. 실랑이가 일어났다. 경찰 책임자가 다가와 “다음부터 이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은 30여분 내외 진행되었다. 기자회견의 마지막은 가족대책위원회 유가족의 기자회견문 낭독이다. “앞으로는 이런 아픔이 어느 누구에게도 다시는 없었으면 한다.” 기자회견문을 낭독하던 권미화씨가 끝내 울먹였다. 2학년 6반 고 오영석군의 어머니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기자들이 흩어진 뒤에도 권씨는 “내 가슴에 아직도 맺힌 말이 많다”며 눈물을 보였다.
농성 6일차에 접어들면서 농성장은 체계를 어느 정도 갖췄다. 이날 오후에도 장대비가 쏟아졌지만 비닐천막이 몸이나마 건사해줬다. 해가 나자 유족들은 젖은 옷을 비닐천막 줄에 내걸었다. 청운동사무소 벽에는 세월호 희생자 304명의 영정사진이 실린 현수막이 걸려 있다. 안산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세월호 유족들이 들고 걸었던 플래카드다. 26일 6일차 기자회견을 마친 후, 회견문을 낭독하기 전 짧게 자신의 생각을 발언했던 김재만씨(2학년 6반 고 동영군 아버지)가 플래카드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꼬깃꼬깃 그가 자신의 발언 내용을 손으로 쓴 종이쪽지가 들려 있었다. 기자가 내용을 물어보니 “앞에 서니 떨리고 해서 채 반도 못 읽었다”고 겸연쩍어하며 종이를 보여줬다. “대통령님, 국민을 위한 국회의원님께 고합니다. 저희 실종자 가족과 유가족들이 왜 청와대, 국회, 광화문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목소리를 높이겠습니까. 저희들은 꿈과 희망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과 희망을 다시 찾기 위해 국민과 함께 한 목소리로 외치는 이유는 대한민국호가 침몰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유족들의 움직임을 보면 의문이 든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5월 16일 유가족들을 만났다. “여한이 없도록 유가족들이 원하는 특별법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언론 보도를 보면 유족 대표에게 자신의 직통 휴대폰 번호까지 공개하며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했다. 그런데 왜 유족들은 못 만나고 있을까.
대통령의 일정이나 업무는 많다. 이해를 못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이 아니라면 청와대 행정관이라도 보내 유족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전혀 응답이 없네요. 청와대 쪽 사람은 단 한 번도 나와 보지도 않았어요.” 이날 기자회견이 끝난 뒤, 기자의 물음에 유경근 가족대책위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다. 연락할 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청와대 쪽 연결창구가 마지막으로 작동한 것은 지난 지방선거 직전까지였다. 그 후 일절 응답이 없다. “이곳(청운동주민센터)에 오면서 문자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유족들의 입장은 대통령 면담이지 다른 의도는 없다는 취지를 정리해 메시지를 보냈어요. 읽었다는 확인 답장도 없네요.”
대신 불거진 것이 CCTV 의혹이었다. 청운동사무소 건널목 신호등 앞에는 CCTV가 있다. 다른 CCTV가 도로 쪽을 향해 있는 데 비해 유별나게도 이 CCTV만은 청운동사무소 주차장을 비추고 있었다. 청와대나 대통령 경호실에서 감시용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다. 서울경찰청 교통정보센터 관계자는 <주간경향>에 “자세한 것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 CCTV는 우리 관할이 아니라는 것은 말씀드릴 수 있다”고 밝혔다.
8월 27일과 28일은 밤 늦게 청운동 유족 농성장을 방문했다. 농성이 장기화되면서 모든 유가족들이 이곳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농성하는 유가족도 보통사람입니다. 가족이 있고 또 다른 애들이 있어요. 그 애들도 챙겨줘야 하니까요.” 김종기씨의 말이다. 가족들은 안산분향소 앞에서 매일 오전 10시, 전세버스를 타고 광화문과 이곳 청운동사무소로 온다. 다시 안산의 집으로 향하는 시간은 저녁 9시 30분. 편도로 안 막히면 1시간, 막히면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유민 아버지 김영오씨의 단식이 45일을 넘기자 악플이 쏟아졌다. 어버이연합 등은 광화문 농성장 옆에서 ‘유가족들이 요구하는 세월호 특별법을 비판하며’ 치킨과 짜장면을 먹는 퍼포먼스도 벌였다. 단식을 하는 김영오씨를 조롱하는 퍼포먼스였다. 종편은 김영오씨가 과거 진도체육관이나 청와대 앞에서 박 대통령 면담 시도를 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는 방송을 했다.
청와대쪽 사람 한 번도 나와보지 않아
“더 많은 보상을 받기 위해 시체팔이를 한다, 유가족이 벼슬이냐는 식의 글을 읽으면 정말 가슴이 찢어져요. 책임자 처벌, 특별법 제정이 된 다음의 일이에요. 아직 아무것도 이뤄진 것이 없잖아요. 우리 같은 유가족이 또 생기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리는 이것이 유가족만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희생자는 우리 아이들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부모 형제에게 벌어진 슬픈 일이에요. 304명 유가족으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우리의 바람입니다.” 8월 27일 청운동에서 만난 정성욱씨(2학년 7반 고 동수군 아버지)의 말이다.
9월 1일이면 국회가 개원한다. 가족대책위는 이날 오후까지 세 차례 여당 원내대표와 면담을 하지만 큰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유경근 대변인은 “결국 서로 입장차만 확인하고 헤어지지만 그래도 자꾸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건 304명 유가족만의 일이 아니잖아요”
27일 오후, 청운동 주민센터를 나와 청와대 앞 효자삼거리까지 걸었다. 이곳에는 정의당과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이날로 7일차다. 의원들이 청와대 앞에 나와 있는데 청와대 쪽에서 나와보는 사람은 없을까. “전혀 없네요.” 김제남 정의당 의원의 말이다. 김 의원은 국회의원이 되기 전 환경운동을 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천성산 터널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지율스님이 이곳에서 두 달 넘게 단식농성을 했다. 김 의원은 지근거리에서 그때의 상황을 지켜봤었다. 그때와 지금은 어떻게 다를까. “알다시피 광화문광장에서 단식을 진행한 문재인 의원이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을 할 때였어요. 당시 문 수석은 노 대통령과 면담은 이뤄지지 않더라도 꼭 단식 현장을 방문해 스님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곤 했습니다. 바로 옆에서 유가족들이 1인 릴레이시위를 하는데, 그래도 이 정도로 철저히 외면하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세월호특별법 농성장에도 유가족 천막이 있다. 이곳으로부터 약 1.7㎞, 도보로 약 30여분 거리다. 광화문에서는 매일 저녁 7시 촛불집회가 열린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광화문 농성장 입구에 세워져 있는 촛불연등에 불이 들어온다. 이 촛불연등은 지난 5월 주말에 열린 범국민촛불행동 때 제작되었던 것이다. 그 후 한동안 안산분향센터에 가 있다가 유족들이 광화문광장 농성을 시작하면서 다시 광화문에 돌아왔다.
8월 28일, 유민 아빠 김영오씨는 단식 46일 만에 “긴 싸움을 위해 새로운 출발을 한다”며 단식 중단을 선언했다. 유민 아빠의 빈 자리를 시민들이 채웠다.
세월호 대책회의의 스태프로 일하는 배병근씨에 따르면 7월 14일 광화문 유가족 농성이 시작된 이래 광화문 단식에 참여한 총인원은 8월 28일 저녁 현재 4955명이었다. 전날 집계는 4685명이었다. 하루 사이에 약 300명의 단식 참여자가 늘어났다. 배씨에 따르면 광화문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2만6446명이 ‘수사권, 기소권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을 요구하며 단식을 진행했으며 지역과 해외를 포함해 34개의 단식농성장이 만들어졌다.
8월 27일 저녁, 촛불문화제가 끝난 뒤 광장 한 구석에서 스마트폰으로 신문기사를 보고 있는 정상호씨(46)를 만났다. 울산에서 부동산업을 하고 있는 정씨는 “인터넷으로 광화문 소식을 보면서 도저히 미안한 마음을 참을 수 없어서” 단식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이날로 단식 3일차였다. “단식하러 서울에 올라가겠다고 하니, 제 처가 우스갯소리로 하루도 못 참을 거라며 내기하자고 했어요. 원래 배고픈 것을 못 참는 성격이거든요. 사실 내일까지 계속하게 될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어린 두 아이를 키우는 정씨는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세월호 사건이 났을 때 아버지는 뭐했냐고 물을 경우 떳떳한 아버지가 되고 싶어서” 단식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유민 아빠 뒤이어 희망 만드는 사람들
단식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광장 옆에 마련된 천막 중에는 세월호 추모 리본을 만드는 가족지원 ‘리본공작소’도 있다. 각자가 시간에 여유가 있을 때 참여하는 방식이다. 인터뷰에 응한 주부 김효원씨(가명·49)는 ‘딱 그 나이의 아이를 둔 엄마로서’ 외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강남에 거주하는 기독교 교인이라고 밝힌 그는 요즘 속상한 일이 종종 있다고 덧붙였다. “아는 집사님이 카톡으로 세월호 유가족에 대해 흠집을 잡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을 보고 ‘아니 상식이 있으신 분이 저런 메시지가 어떤 뜻인지 모르고 보내셨냐. 이런 거 보내려면 앞으로 메시지 보내지 말라’고 말했어요.” 그는 언론의 책임에 특히 분노했다. “유족들이 이렇게 어렵게 싸워도 일반 국민들은 모르잖아요. 악플을 다는 사람도 결국 중간에서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는 달라져야 한다고 이야기했었다. 이것은 당위다. 특별법을 둘러싼 대립, 유가족에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인신공격, 정치적 색깔론 공세만 보면 한국 사회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디서 우리는 ‘달라진 대한민국’을 발견할 수 있을까.
8월 28일 오후 11시 30분. 청운동 주민센터에서 다시 광화문광장으로 돌아왔다. 기자가 불꺼진 광화문 농성장을 돌아보는 와중에 한 여성이 스태프 천막을 찾아왔다. 제주도 서귀포시에 거주하는 이유미씨(45)다. 서울에서 교육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에 이곳에서 밤을 새고 하루 꼬박 단식에 참여한 뒤 다음날 마지막 비행기로 제주로 내려갈 예정이다. “세월호 사건이 나고 노란리본을 달았는데, 한동안 달지 않고 지내다가 유민 아버지 단식을 보면서 다시 달기 시작했어요. 아직 잊어버릴 때가 아닌데, 아직까지 이뤄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너무 많이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곳에 오는 걸 결심했습니다.” 그는 “하루 동안 단식에 동참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돌아가서 동네에 가서 이야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날까지 광장 단식 참여자가 4956명으로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