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쫓아아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다.”
아들 휘가 “왜군을 무찔러도 임금은 아버지를 버릴 것”이라며 전투에 나서지 말 것을 권고하자 이순신은 이렇게 답한다. 나라의 주인은 소수의 엘리트가 아니라 이 땅에 발 붙이고 사는 민중이라고.
김한민 감독의 <명량>은 이순신 장군을 위한 헌사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에서 12척의 배로 133척을 물리친, 세계 해전 사상 유례없는 승리를 거뒀다. 1597년 임진왜란 6년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재공략에 나선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오지만 조선수군은 몰락 직전이다. 남은 것은 12척의 배. 한산대첩에서 위세를 떨쳤던 거북선은 한 척도 없다. 장수는 전의를 상실했고, 백성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히데요시는 해적 출신의 구루지마까지 파견한다.
이순신은 명량에 출전하기 전 백성들의 눈을 본다. 두려움에 빠져 있다. 저 두려움을 어찌 없애야 하나. 이순신은 말한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 용기는 백배 천배 큰 용기로 배가되어 나타날 것이다.” 구루지마는 전투 전 포로의 수급을 배에 실어 조선수군 진영에 보낸다. 두려움을 극대화해 백성들과 군사들의 기를 꺾기 위해서다. 이순신과 구루지마는 왜 백성들을 주목했을까. 이름 없는 백성들의 후방지원이 없이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영화 속 경제]명량-백성이 있어야 임금도 있다](https://img.khan.co.kr/newsmaker/1092/20140901_76.jpg)
‘말 없는 다수’의 중요성은 ‘롱테일법칙’으로 설명된다. 롱테일법칙(Long Tail theory)이란 하위 80%가 상위 20%보다 더 뛰어난 가치를 창출한다는 이론이다. 상위 20%가 하위 80%를 이끈다는 ‘파레토법칙’의 반대 개념이다. 그래서 역파레토법칙이라고도 부른다. 80%의 형태가 공룡의 꼬리처럼 길게 늘어진다고 해서 ‘긴 꼬리 법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2004년 미국의 <와이어드>(Weird)에서 처음 사용했다.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닷컴은 전체 수익의 절반 이상이 오프라인 서점에는 비치하지도 않는 책 판매에서 나온다. 포털사이트 구글은 거대기업이 아닌 꽃배달업체나 제과점 등 작은 기업들에서 수익의 상당 부분을 얻는다.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기사의 고료는 독자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지급된다.
롱테일법칙은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가능해졌다. 온라인에서는 전시비용이나 물류비용이 추가적으로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 교보문고에서는 책을 더 비치한다고 해서 별도의 경비가 발생하지 않는다. 책 한 권을 더 비치하는 것에 따른 한계비용은 0에 가깝다.
롱테일법칙은 20대 80의 파레토법칙에 익숙해 있던 경제·경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충격을 줬다. 개성과 취향이 다양화되고 복잡해진 사회에서 롱테일법칙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줬다.
민주주의는 롱테일법칙이 지배하는 사회다. 임금과 소수의 귀족이 이끄는 봉건시대와 달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1인1표제 투표는 민중에게 힘을 줬다. 선진화된 사회는 한두 명의 철인이 이끄는 사회라기보다 집단지성이 지배하는 사회다. 댓글문화도 롱테일법칙의 유산이다. 요즘 여론은 매체가 아니라 이름 없는 네티즌들의 댓글에서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국가정보원이나 군이 지난 대선 때 댓글달기에 나선 것은 이 때문이다.
명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이라는 특출난 명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파레토법칙이다. 하지만 조선수군 진영에 양식을 대고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던 다수의 백성들이 없었다면 해전의 승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런 고생을 했다는 것을 후세는 알까”라는 노 젓던 백성의 말은 그래서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백성이 있어야 임금이 있는 사회, 그것이 롱테일법칙이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