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유민 아빠가 어떤 사람이기를 기대했던 것일까. 두 딸을 늘 곁에서 품어주며 휴가철에는 여행도 함께 떠나는 넉넉한 아빠, 그리고 아무리 분노가 솟구쳐도 권력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이성적으로 말하는 교양 있는 아빠. 적어도 세월호 특별법 투쟁의 상징이 되었던 부모라면 그런 모습 정도는 갖추어야 자격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알고 보니 그는 금속노조 조합원이었고 이혼도 하고 두 딸도 직접 키우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양육비조차 거를 때가 있었다고 한다. 보수신문과 종편채널들은 그럴 줄 았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김영오씨를 죽은 딸을 갖고 ‘시체장사’라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몰아붙였다. 그를 비방하는 유언비어를 담은 출처불명의 카톡 메시지가 대대적으로 유포되었고, 유씨를 조롱하는 폭식투쟁을 하겠다고 나선 곳까지 있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딸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겠다며 목숨을 걸고 단식을 벌였던 유민 아빠는 수없이 조롱받고 난도질당해야 했다. 세상에 죽은 딸에 대한 사랑의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 아빠가 카톡을 공개하고 통장내역을 공개해야 하는 사회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유민 아빠는 상처받은 개인사를 갖고 있거나 경제적으로 궁핍하여 아비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함을 자책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많은 아버지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슬픔과 분노 앞에서는 이성을 가누지 못하게 되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김영오씨의 금속노조 조합원 신분, 이혼 경력을 들추며 자식의 죽음을 슬퍼할 자격조차 없는 것처럼 몰고간 행태의 바탕에는 결국 가진 것 없이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들을 멸시하는 사고가 자리하고 있다. “이혼하고 힘들게 살다 보니 보고 싶어도 자주 못 보고, 사주고 싶어도 많이 사주지 못했던 것에 억장이 무너지기 때문에 목숨을 바쳐 싸운다”는 그의 말은 이미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유민 아빠를 향한 인격 살인은 계속되었다.
대통령이 보여준 모습도 본질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던 유민 아빠를 끝내 외면했다.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비서관조차도 보내지 않았다. 바빠서 유족들을 만나지 못한다던 대통령은 광화문광장을 피해 그대신 멀리 자갈치 시장을 다녀왔다. 비난보다 더 무서운 외면이었고 무시였다. 정권에게 유가족들은 더 이상 손잡아줄 대상이 아니라 이제 상종해줘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참사의 기억이 아직도 그대로인 4개월 반 만에 정권은 이렇게 급변침해버렸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부모들이 인격적 살인 앞에서 고통받아야 했다. 죽어간 아이들의 부모를 향해 가만히 있으라며 사찰을 하고 모략을 하고 조롱을 했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직후 우리는 이제야말로 물질 우선의 사회를 넘어 인간 존중의 사회로 가야 함을 말했다. 그러나 유민 아빠의 목숨을 건 단식에 대한 조롱이 버젓이 활개칠 수 있는 이 사회의 모습은, 세월호 이전과 이후 우리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자식이 죽었기에 슬퍼했고 분노했고, 그러했기에 목숨을 걸었던 단식이 조롱받는, 이곳은 분명 야만사회이다.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세월호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대체 그 죄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시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