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들에게 노동조합은 용기가 필요하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직장을 구하려면 지도교수의 추천서가 필요한데 찍히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떠돌이 비정규직 박사’ 인생은 바뀌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떠난 대전 월드컵경기장이 고즈넉하다. 경기장으로 향한 길, 나무마다 달린 노란 리본과 떼지 않은 환영 현수막이 나부낀다. 육교 위에 올라 경기장을 본다. 그는 이곳에서 세월호 유가족이 건넨 노란 리본을 달고, 팽목항 2000리를 다녀온 십자가를 받았다. 그는 말했다.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빈다.”
그가 남긴 말을 되뇌며 걷는다. 월드컵경기장 전철역. 역무원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청하며 교황을 봤느냐고 묻는다. 고개를 흔든다. 교황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전전긍긍했던 역무원들. 그런데 그들은 대전도시철도공사의 정규직 역무원이 아니다. 대전지하철 22개 역 중 20곳이 민간위탁 역이다. 비정규직역 비율이 91%로 전국에서 가장 높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 정규직의 절반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비정규직 역무원. 지방정부가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요람, 대전의 자랑 대덕연구개발특구로 향한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비롯해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원들이 모여 있다. 대전은 물론 전국에서 가장 많은 박사들이 가입한 전국공공연구노조 사무실. 연구단지 4거리에서 아침 선전전을 마치고 돌아온 이광오 사무처장이 보고서를 한 보따리 내민다. “연구원 10명 중 4명이 비정규직이에요. 스펙도 좋고 유학파도 많아요. 지금은 비정규직이지만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죠.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 때쯤이면 쫓겨납니다.”
가장 많은 박사, 전국공공연구노조
2013년 10월 공공연구노조가 발표한 <과학기술계 정부출연 연구기관 비정규직 실태조사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연구원에서 일하는 노동자 중 45.3%가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 연구원은 5036명(37.7%)으로 2008년에 비해 38%나 늘었다. 연수과정에 있는 노동자를 포함하면 절반에 이른다. 비정규직 연구원의 평균 임금은 정규직 대비 58~61%다. 근속연수는 정규직은 12년인데 비정규직은 24.3개월이다. 떠돌이 박사와 날품팔이 연구원들로 과학한국과 노벨상을 꿈꾼다.
지난달 취임한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비정규직을 놔두고 내수를 활성화하기는 어렵다. 국민행복시대를 위해서라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중구조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정부는 ‘상시 지속적인 연구업무에 종사하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7월 29일 정부 고위관계자 입에서 나온 숫자는 400명이었다. 과학기술계는 200명으로 5036명 중 3.9%만이 정규직이 된다는 것이다. 이 처장은 “지금까지 속아왔으면서도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정부만 바라보고 있다”고 말한다. 박사와 투쟁조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대덕밸리를 가로질러 한국원자력연구원을 지난다. 연구원 정문에 있던 천막이 치워졌다. 지난 1월 10일 연구원과 공공연구노조는 불법파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싸웠던 28명을 직접 고용하기로 했다. 합의 내용은 부족하지만 싸우면 세상은 달라진다.
“김박은 어디 갔어?” 대덕단지 끝자락에 있는 국가수리과학연구소 2층 식당. 식판을 든 10여명의 연구원들이 김종호 박사를 찾는다. 보통 사람은 골치가 지끈거리는 수학·물리학을 전공한 박사들이다. 어린 시절 똑똑하다고 칭찬받으며 에디슨과 노벨상을 꿈꾸던 영재들이었다.
노동조합 사무실. 노사 교섭 결렬에 따라 총회를 준비하고 국회 국정감사를 앞두고 연구소의 현실을 알리느라 바쁘다. 투쟁조끼를 입고 있는 최연택 지부장도 수학박사다. 그가 건넨 명함에 가상생태계모델연구개발팀 연구원이라고 적혀 있다. 거대과학계산, 특수암호 알고리즘, 미래 인터넷 네트워크, 수리적 뇌기능 판독, 공학해석 수치프로그램 등 부르기도 어려운 연구과제들이다. 짧게는 2년, 길게는 10년을 팀을 구성해 연구하는 프로젝트다.
그런데 석·박사들은 연구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대한수학회의 추천으로 2012년 9월 부임한 김동수 소장은 직원들과의 첫 간담회에서 계약 만료 6개월 전에 나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지금까지 40여명의 연구원들을 해고하고 연구 예산을 반으로 삭감했다. 연구는 멀리하고 수학캠프와 수학자대회 등 홍보에만 열을 올렸다. 규정을 바꿔 연구소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그냥 때려치우고 이민 가려고 했어요. 근데 어느 분이 주인의식 얘기를 하더라고요. 계약직이지만 내 연구소라고 생각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연구소를 바꿔놓아야 다음 사람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앞에 나서게 됐죠.” 최연택 박사가 노조 일에 나선 이유다.
정부만 바라보는 비정규직 박사들
정규직이 먼저 나서 노조를 만들었고, 비정규직 연구원들이 가입해 함께 싸웠다. 지난해 9월 3일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고 계약기간 만료만으로 해고할 수 없도록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최연택 지부장을 비롯해 6명을 해고했다. 최근 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로 판정 났지만 복직시키지 않고 있다. 노조는 ‘국가수리과학연구소(NIMS)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라는 공문을 만들어 국제수학연맹에 보냈다. 소장과 연구소 관리자들이 일산 킨텍스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수학자대회의 주요 직책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에게 노동조합은 용기가 필요하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직장을 구하려면 지도교수의 추천서가 필요한데 찍히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도교수를 통해 노조 탈퇴나 소송 취하를 요구하는 일도 벌어진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떠돌이 비정규직 박사’ 인생은 바뀌지 않는다. 얼마 전 이곳을 떠난 한 연구원은 전자통신연구원의 비정규직 박사로 일하고 있다. “길들여진 독수리처럼 대부분이 고개 숙이고 살고 있어요. 저희는 싸우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행복하죠.” 최 지부장은 다른 연구원을 찾아다니며 비정규직 연구원들이 나서고 정규직 노조가 연대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모델들을 거부하라는 교황의 말처럼.
신탄진으로 향하는 버스가 갑천 다리를 건너자 굴뚝이 보인다. 대덕산업단지다. 왼편에 자동차 부품회사 한라비스테온공조 대전공장이 보인다. 평택공장을 포함해 2000명의 정규직 노동자가 일한다. 지난해 직원 평균 연봉은 8819만원이었다. 올해 임금교섭에서는 상여금 600%와 수당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 급여가 더 많아진다. 대전에서 제일 좋은 회사다. 노동조합의 힘은 멀리 울산공장에는 미치지 못했다. 울산공장은 사내하청 노동자만 모여서 일하는 ‘비정규직 공장’이다.
빗방울이 흩날린다. 신탄진역을 지나 대덕단지 끝자락에 있는 대한이연 공장을 찾았다. 쉬는 시간, 노동조합 사무실이 북적인다. 정년이 지나 70세까지 일하는 3명의 청소노동자는 촉탁직이지만 생산라인은 물론 식당, 경비직원까지 243명 모두 정규직이다. 매년 7만~8만원가량 임금을 올려 주야 맞교대를 하는 노동자의 연봉은 6000만원 안팎이다. 300명 미만의 중소사업장이지만 안정된 일터다.
연구 전념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노조 신현수 사무장과 함께 공장을 둘러본다. 한 조합원이 자동차 엔진에 들어가는 피스톤링을 보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노조 대의원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조합원을 안내하자 환하게 웃는다. 정규직이 휴가로 비운 자리에 1개월 계약직으로 들어와 일하다가 정규직이 됐다. 지금은 단기계약직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정규직으로 뽑았다가 정년퇴직자 자리로 옮기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3년 동안 20여명이 새로 입사했다. 신 사무장은 힘 있는 노동조합이지만 안주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젊은 노동자들과 함께 학습 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대한이연을 나와 이명박씨 사돈기업, 대전의 최대 사업장 한국타이어로 향한다. 1년 6개월 동안 15명의 노동자가 집단 사망해 노동계가 2008년 ‘최악의 살인 기업’으로 선정한 회사다. 2012년 매출액이 2조3000억에서 지난해 7조로 급증했지만 정규직은 제자리걸음이다. 사내하청 노동자가 1837명이나 된다. 대전에서 가장 큰 회사지만 지난해 정규직 연봉은 6000만원으로 대한이연 수준이다.
1993년 입사해 20년 동안 일하면서 산업재해와 비정규직 문제를 알리고,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싸운 노동자. 생활한복이 잘 어울리는 ‘한국타이어 민주노조 희망연대’ 정승기 의장이 환한 얼굴로 맞는다. 2010년 3월 해고됐다가 대법원에서 이겨 작년 7월 복직했지만, 한 달 만에 다시 해고당한 노동자. 하지만 그는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서류봉투에서 비밀 문건을 꺼낸다. 노조활동과 사내하청에 관한 자료들이다. 그를 신뢰하는 현장의 제보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건네줬다. ‘대전의 삼성’이라고 불리는 한국타이어지만 진실은 가라앉지 않는다. “노동조합이 제대로만 역할을 했어도 그렇게 많이 죽지 않았을 것이고, 노동조건도 이렇게 악화되지 않았을 겁니다. 올해에는 한국타이어 안에 민주노조의 깃발이 휘날릴 것입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로 나간다. 빗방울이 굵어졌다. 지역에서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해온 민주노총 박종갑 국장과 함께 시청으로 향한다. 대전에만 콜센터 노동자가 1만5000명에 이른단다. 대전에 몰려 있는 물류회사와 우편집중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열악한 밤샘노동을 하고 있다. 최근 철도고객센터의 콜센터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했다. 노동운동이 정파싸움에 매몰되지 않고, 노동조합이 공장 밖으로 눈을 돌려 이 노동자들을 조직했으면 하는 게 박 국장의 바람이다.
시청 앞 주차장, 트럭 위에 세워진 천막농성장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한 노동운동가가 잡아온 참돔 매운탕과 구이로 공공운수노조 택시지부 대전지회 송민영 총무가 한 상을 차렸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전액관리제를 위반하고 있는 대전시내 76개 택시회사를 처벌하라며 싸우고 있는 181일차 농성이다. 민주노총 간부였던 조훈 국장을 10년 만에 택시노동자로 만났다. 대한이연에서 식당·경비노동자까지 정규직으로 전환시키고, 롯데백화점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싸웠던 민주노총 엄연섭 전 본부장이 일을 마치고 천막을 찾았다. 사람 냄새 가득한 천막의 밤이 깊어간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