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옛터인 요동반도는 고구려가 3세기에 다시 장악하기 시작하여 4세기 말 광개토대왕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우리 민족의 땅이었다. 고구려는 이후 무려 300년 동안이나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을 움켜쥐고 찬란한 황금시기를 맞게 된다.
잃어버린 상고사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 민족의 기상을 깨우고 옛 땅을 찾아가는 역사기행이다. 중국과 북한 땅에 있는 고구려의 유적들은 역사의 기록은 있으나 그 흔적 찾기와 해석에는 어려움이 있다. 잃어버린 선인의 발자취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으로 동북아 시대를 맞는 통일 한반도의 지향점은 선명해진다.

홀본산성 정상에서 내려본 전경의 일몰.
점차 잊혀지는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땅
우리 민족 시원의 땅을 찾아 고구려의 기상이 서린 잃어버린 유적을 찾아간다. 잃어버리는 것은 통탄할 일이나, 잊혀져가는 것은 더욱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중국 둥베이 지방의 최대 도시인 선양에 내려선다. 선양은 우리 민족의 얼이 서려 있는 땅이다. 고구려의 옛터를 찾아갈 수 있다는 감개무량함이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른다. 선양은 둥베이 남동부의 노년기 산지의 끝자락이 평야와 만나는 랴오허강 유역에 위치해 있다. 일찍이 전국시대부터 드넓은 대지에 북방민족들의 기상이 드높았다. 옛 이름은 봉천(奉天), 만주어로 무크덴(Mukden)이라 불리는데, 원주민인 만주족은 지금까지도 무크덴이라 하고, 유럽에도 무크덴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한대에는 요동군에 속했고, 위나라, 수나라, 당나라 때에는 고구려의 영토에 속해 있다가 다시 당의 지배하에 심주가 되었고, 이후 발해의 땅이 된다. 이후 요(遼), 금(金)시대를 거쳐 원, 명나라에 이르러 선양위(瀋陽衛)를 둔다. 그 후 청(淸)나라 때에는 수도로 삼아 성경(盛京)이라 불린다. 1644년 다시 베이징을 국도로 정한 뒤에는 이곳을 제2의 수도로 삼고, 1657년에 봉천부를 설치한다. 이후 19세기 말 러일전쟁(1904∼1905)을 겪고 청조가 멸망에 이르자 지방 군벌과 그 두목 장쭤린 정권의 본거지가 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는 1932년 일본에 의해 ‘만주국’(滿洲國)이 건국되면서 만주국 제1의 도시가 된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철도교통을 기반으로 중국 최대의 중화화공업지대로 발전하며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선양은 지금도 중국 산업의 중추이다. 중공업이 최절정에 달하던 1970년대에는 톈진, 상하이와 함께 중국의 3대 공업도시로 손꼽혔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중공업이 쇠퇴하면서 소프트웨어 산업과 공업자동화를 추진하고 있다.

고구려역사기행을 나선 답사여행객들.
고구려 산성 전형을 보여주는 백암산성
공항을 벗어나 도심에 자리한 랴오닝성 박물관을 먼저 둘러볼 요량이다. 박물관을 둘러보며 우리 민족 상고사와의 연결점을 찾아본다. 요하문명은 동아시아 문명의 시원으로 세계 문명 가운데 가장 앞선 문명이라고 해석되어지고 있다.
우리 민족은 개천 이래부터 6000년을 넘게 동북아를 무대로 한 요하문명의 중심축으로 환인-환웅-단군에 이르는 한나라, 배달나라, 고조선으로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기개와 자부심을 펼쳐 왔다.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역사의 밑그림을 다시 그려본다. 박물관은 제1관에 구석기와 신석기, 동석병용기 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제2관은 중국의 상·주나라 시대에 해당하는 랴오닝성 지역의 청동기 유물들이, 제3관은 진한시대 이후 당나라 시대까지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랴오닝성에서 발견된 요하문명의 유물·유적은 내몽고자치구에서 다수가 발견되었다. 천천히 둘러보면, 고조선 시대의 청동기 문화, 배달문명 시대의 옥기 문화, 그보다 앞선 신석기 문화가 요하문명에 포함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이 지역이 배달문명인 요하문명의 영향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고조선의 땅이었고 그 뒤로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에서 우리 땅이었고, 이후 거란, 여진, 원, 명, 청, 만주국에 이르는 수천년 동안 동북아의 패권을 두고 국가간 생성과 소멸의 역사를 거듭한 것이다. 특히 고조선의 옛터인 요동반도는 고구려가 3세기에 다시 장악하기 시작하여 4세기 말 광개토대왕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우리 민족의 땅이었다. 고구려는 이후 무려 300년 동안이나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을 움켜쥐고 찬란한 황금시기를 맞게 된다.

중국 랴오양시에 위치한 고구려의 백암산성
박물관을 나와 고구려 산성의 전형을 알아볼 수 있는 백암산성을 찾아간다. 백암산성은 고구려가 축성한 100개가 넘는 성 중에서 현존하는 것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산성이다. 중국에서는 연주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지리적으로 만주벌판이 끝나면서 백두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경계에 자리하고 있다. 산성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다. 깎아지르는 절벽 아래로 타이쯔하(태자하·太子河)가 흐르고 있어 적의 침입이 어렵다. 동쪽은 비교적 성벽을 쌓지 않았거나 아주 느슨하게 쌓았으며 만주벌판에 면해 있는 남쪽과 서쪽으로 침입할 적에 대비하여 남서쪽 성벽을 가장 견고하게 쌓았다. 또한 산성을 보호하기 위해 덧성을 쌓았고, 성의 안쪽과 바깥쪽으로 치성을 쌓았다. 남서쪽으로 빙 둘러친 성의 외벽을 돌아 망대까지 오른다. 망대에 올라 사위를 돌아보니 과연 뻥 뚫린 남서쪽 벌판으로 탁 트인 전망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성을 다 내려와서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 백암산성은 평지에 닿는 부분에까지 외벽을 둘러쳐 놓아 산성의 크기와 웅장한 자태에서 광활한 대륙을 지배하던 옛 고구려인의 웅장한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약 5m 높이의 장대가 있어 주위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장대 주위에 내성이 쌓여 있는데, 속칭 아성(牙城)이라 부른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 타이쯔하가 흐른다. 타이쯔하는 랴오양을 지켜주는 천연 방어벽으로 랴오양시를 관통해 143㎞를 흘러나간다.

홀본산성의 가파른 오르막 계단.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 홀본산성에 올라
다음 여정인 홀본산성으로 길을 잡는다.
홀본산성은 압록강의 지류인 비류곡(沸流谷·지금의 혼강(渾江))에 위치하는데, 중국에서는 오녀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산성은 깎아지른 높은 봉우리에 위치한다. 가파른 절벽의 지형을 그대로 살리고, 나머지 반대편은 성벽을 쌓은 형태이다. 또 산성에는 적의 움직임과 동태를 살피기 위한 망대를 세우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옹성을 쌓아 직접 타격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옹성은 본래 산성과 평지성 할 것 없이 축성되어 있었지만, 후대에 이르러 무기가 발달함에 따라 점차 소실되었다. 또한 절벽의 정상부는 평평하여 사람이 성내에 살았다. 산성에 오르기 위해서는 셔틀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산모롱이를 몇 번 돌아야 한다. 매표소에 이르니 ‘오녀산산성’이라 새겨놓은 커다란 비가 보이고 좁고도 가파른 계단이 나타난다. 급경사를 이루어 숨이 조금 가빠질 즈음이면 8부 능선쯤에 서문이 자리하고 있다. 성벽과 성문에 고구려 고유의 양식이 나타난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이 기원전 34년에 천애의 절벽을 이용하여 쌓은 석성으로 축성 방법은 고구려 산성의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신화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는 ‘왕이 홀본천에 이르러 그곳 땅이 기름지고 산세가 험하고 견고하므로 이곳에 마침내 도읍을 정하고 집을 짓고 살면서 3년 후(기원전 34)에 성곽을 쌓고 궁실(宮室)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홀본산성 내부의 천지.
홀본산은 해발 820m의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위의 산 중에서도 가장 높이 솟아오른 산이다. 특히 깎아지른 절벽의 높이는 200m에 달하는데, 경사가 매우 급한 편이다. 산은 동쪽을 제외하고는 3면이 모두 깎아지른 단애를 이루고 있다. 고구려의 전형적인 산성 양식인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이다. 성 안에서는 1986년 발굴을 통하여 고구려 초기로 보이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기도 했다. 산성 안의 평지에는 돌로 쌓은 연못 ‘천지’가 있으며, 지금도 맑은 물이 흐른다.
잊혀진 고구려의 흔적을 찾는 여행. 역사를 제대로 계승하지 않으면 문화나 유적은 그 의미가 상실되고 만다. 잊혀진 역사를 제대로 인식할 때, 새로운 역사의 여명은 밝아올 것이다.
<글·사진 이강 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