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생도도 낭만 누리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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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육사는 ‘군인정신’과 ‘대학생활’의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상태다. 생도들은 군인의 길을 선택했지만 대학생활의 낭만도 함께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군사관학교는 재학 중 결혼을 금지하고 있다. 이는 육사의 오랜 전통인 결혼과 흡연, 음주 등을 금지하는 소위 ‘3금 규정’에 따른 것이다. 3금 규정처럼 개인의 사생활 측면의 문제를 제도적으로 금지하는 나라는 전 세계 사관학교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그런데 올해 서울고등법원은 여자 친구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육사가 생도를 퇴학시킨 것은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육사의 ‘동침 및 성관계 금지규정’이 도덕적 한계를 위반하는 성행위 등을 금지하는 것으로 이를 과잉 적용할 경우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다”고 밝혔다. 

눈물 글썽이는 육사 69기 졸업생. | 홍도은 기자

눈물 글썽이는 육사 69기 졸업생. | 홍도은 기자

이 판결은 대법원에서도 뒤집힐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앞서 육사는 동료 생도의 제보를 받고 여자 친구와 성관계를 가진 생도를 퇴학 처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신입생 모집 전형방법에도 변화
재밌는 것은 전·현직 육군 장군이나 영관급 간부들이 청첩장을 돌릴 때 아들·딸의 나이를 계산해 보면 생도 때 이미 아버지가 된 사례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는 누가 군 당국에 ‘찔러서’ 문제가 되면 퇴교당하는 것이고, 동료 생도들이 이를 감춰주고 도와주면 장군까지 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듯 3금은 걸면 걸리는 측면이 있어 별로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분위기를 감안한 듯 육사는 고민에 빠졌다. 사회가 크게 변하면서 생도 교육도 시대 흐름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과 시대 분위기와 관계없이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생도들에게 엄격한 군기를 주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어서다. 이는 육사 신입생 모집요강과 재학생들의 성적산출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1년 10월, 육군은 “내년도 육군사관학교 입시에 고등학교 성적 우수자들이 대거 지원해 당초 계획보다 입학 정원을 늘리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육군 관계자는 “육사 72기 2차 합격자 625명을 분석한 결과 외국어고와 국제고, 과학고 등 우수 고교 출신이 33.4%(209명)를 차지한 점 등을 감안해 2012년 신입생을 10%가량 더 뽑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상기된 표정으로 “일반고 재학생도 내신 1등급 이상 성적을 가진 우수 지원자가 많아 애초 계획한 240명(여자 24·남자 216)에서 30명이 늘어난 270명을 3차 전형에서 선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로부터 3년 4개월이 흐른 지난달 26일, 육군사관학교는 올해부터 적성우수자를 20% 우선 선발하겠다는 새로운 입시요강을 내놓는다. 2015학년도 입시요강의 핵심은 면접과 신체검사, 체력검정으로 평가하는 2차 적성시험 성적의 반영 비중을 높이는 것이다. 

한마디로 학업성적 우수자보다는 체력을 포함한 군인에 적합한 기질을 가진 지원자를 뽑겠다는 얘기다. “드디어 육사에도 외국어고와 특목고 출신 우수 인재가 몰려왔다”고 기뻐하면서 입학정원까지 늘렸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입장이다.

육군은 이를 ‘군 적성우수자 우선 선발제도’의 신설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육사는 1차 학과시험 합격대상을 남자는 정원의 5배수, 여자는 6배수로 늘릴 예정이다.

육군이 내놓은 ‘군 적성우수자 우선 선발제’를 자세히 뜯어보면 이는 재학생의 잇따른 일탈행위와 가입교생의 무더기 자퇴사태를 막기 위한 처방책으로 보인다.

지난해 사상 최대 생도 45명 자퇴
육사에서는 지난해 5월 남자 상급생도의 교내 성폭행사건을 비롯해 7월 미성년자 성매매로 4학년 생도 구속, 8월 태국에서 생도 9명의 음주·마사지 행위 등 일탈행위가 이어지며 정체성 위기를 겪었다. 

그러자 육사는 지난해 8월 당직근무와 내무검사 점호 등 군기를 대폭 강화하는 제도·문화 혁신방안을 내놓았다. 육군은 생도들의 일탈행위를 막는다며 금혼·금연·금주 등 소위 ‘3금 제도’를 더욱 엄격하게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육사 69기 졸업생들이 2013년 2월 27일 서울 태릉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경례를 하고 있다. | 홍도은 기자

육사 69기 졸업생들이 2013년 2월 27일 서울 태릉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경례를 하고 있다. | 홍도은 기자

육사 출신 예비역들도 “장교라면 생도 시절 참고 이겨내는 극기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없다”며 거들고 나섰다.

하지만, ‘후폭풍’이 일었다. 육사가 대책을 발표한 다음달 자퇴생이 무려 17명이 나왔다. 2009년 7명, 2010년 7명, 2011년 1명, 2012년 10명이 발생한 것에 비하면, 한 달간 자퇴생이 연간 인원보다 많아지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육사에서는 생도 45명이 자퇴했다.

육군이 조사에 착수한 것은 당연했다. 그 결과 통제된 생활 거부와 생도 생활 부적응 등 직접적인 적성 문제로 자퇴한 생도가 16명에 달했다. 다른 대학이나 학과, 직종을 희망해서 그만둔 25명도 군인으로 적성이 맞지 않았던 것으로 조사됐다.

게다가 육사에 1차 합격한 가입교생 가운데서도 자퇴생이 급증했다. 올해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과정에서 74기 신입생 310명 가운데 38명이나 군인의 길을 포기했다.

육사가 성적산출 방식을 변경한 것도 이런 내부의 문제와 연관이 있다. 육사는 최근 지적 역량과 군인적 자질을 동시에 겸비케 한다면서 일반 학과의 배점 비중은 낮추고 체육, 훈육, 군사훈련 과목의 배점을 높였다. 

종전에는 일반학 73%, 군사역량 14%, 신체역량 3%, 휸육 10%였으나 이제는 각각 42%, 25%, 17%, 17%로 변경한 것이다. 이는 남생도에 비해 체력이 약한 여생도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한 측면이 있지만 공부 잘하는 생도보다 군인적 자질이 있는 생도에게 가중치를 부여하겠다는 육군의 정책 방향이다.

육사 신입생의 질은 사회 분위기와 밀접하다는 게 군 간부들의 일치된 진단이다. 불황으로 대학생들의 취업난 등이 심해지면 우수 지원자가 몰리고, 경제가 호황이면 우수 학생의 지원율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이 때문에 육군은 육사 지원자들의 수준이 현격히 떨어지는 해에는 신입생 숫자를 줄여 뽑기도 했다.

지금 육사는 ‘군인정신’과 ‘대학생활’의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상태다. 생도들은 군인의 길을 선택했지만 대학생활의 낭만도 함께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육사는 3금제도 개선책 찾기에 다시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이성교제 허용의 수준이나 금연·금주의 기본 원칙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등을 유연성 있게 다뤄보겠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방향인 것 같다.

<박성진 경향신문 기자 longriv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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