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맥 매카시의 <로드>와 인류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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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강의하는 과목의 하나가 ‘진보와 보수’다. 전공 중 하나가 정치사회학이라 이념구도와 갈등, 그 해소 방향을 가르치는 과목인데, 이러한 이념문제에 대해 양가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정치와 시민사회 영역에서 정책 결정을 두고 이념 대립이 불가피하다고 보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대립과 갈등을 넘어 존재하는 여러 이슈들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념 구도와 갈등은 서구 모더니티의 산물이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자코뱅당과 지롱드당에서, 그리고 칼 마르크스와 에드먼드 버크의 사상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진보와 보수 또는 좌파와 우파는 근대사회에 대한 상이한 해석 및 처방을 제시함으로써 대결구도를 이뤄 왔다. 

보수가 대체로 성장·시장·자유를 중시한다면, 진보는 그 반대로 분배·국가·평등을 강조해 왔다. 우리 사회의 경우 이러한 이념 구도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서야 본격적으로 자리잡아 왔다.

내가 고민하는 것은 건강한 이념 대립 및 경쟁이 여전히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이념 갈등으로 인해 중요한 이슈들이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주장했듯이 지난 20세기는 ‘극단의 시대’(age of extremes)였다.

하지만 새롭게 열린 21세기는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표현을 빌리면 ‘통섭의 시대’(age of consilience)다. 극단의 관점에서 보면 진보와 보수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통섭의 관점에서 보면 이념 대립보다는 인류에게 부여된 새로운 도전들에 지혜롭게 대응해 가는 게 더 중요할 수 있다.

코맥 매카시 장편소설, 정영목 역 <로드>의 책 표지 | 문학동네 제공

코맥 매카시 장편소설, 정영목 역 <로드>의 책 표지 | 문학동네 제공

한 걸음 물러서 보면 극단의 시대와 통섭의 시대가 공존해 있는 게 우리 시대의 정직한 자화상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극단의 시대에서 통섭의 시대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진보 또는 보수 이념의 미래 못지않게 인구·에너지·환경·기후·정보·세계화 등을 포함한 인류의 미래를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이들은 이 이슈들 역시 이념적 관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이념에 따라 개별 이슈의 정책에서 차이가 작지 않다는 점에서 수긍할 수 있는 견해다. 하지만 인구·에너지·환경·기후·정보·세계화 등은 20세기적 이념 대립을 넘어서 새로운 통섭적 해법을 요구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21세기 인류의 미래를 다룬 예술작품들 가운데 내게 인상적인 것의 하나는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의 소설 <로드(The Road)>다. 코맥 매카시는 토머스 핀천, 필립 로스, 돈 드릴로와 함께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다. <핏빛 자오선> 등의 문제작을 냈던 그는 2006년 <로드>를 발표해 세계적인 주목을 다시 한 번 받았다. 퓰리처상을 받은 이 소설은 2009년 존 힐코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로드>의 줄거리는 간결하다. 지구가 대재앙을 겪은 후 운 좋게 살아남은 아버지와 아들이 바다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룬다. 재난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줄거리다. 태양이 가려져 기후는 크게 변했고, 도시문명은 파괴됐고,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무리들이 나타난 처절한 풍경이 배경을 이룬다.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와 사람에 대한 따뜻한 희망을 품고 있는 아들의 위험하기 그지없는 여행이 인류의 암울한 미래와 중첩되면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작품이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현재 우리 앞에 놓인 인류의 미래가 결코 밝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로드>처럼 대재앙이 닥친다고 보는 게 과잉 비관주의라 하더라도 결코 작지 않은 시련들이 인류를 기다리고 있다.

당장 최근의 흐름을 보라. 점증하는 인구의 폭발적 증가가 식량과 빈곤의 문제를 안겨주고 있다면, 석유자원의 고갈이 가시화되면서 에너지 확보를 둘러싼 국가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또 빠른 속도로 진행돼 온 지구 온난화가 기후 격변을 낳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데도 그 대책에 대한 논의는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매카시가 <로드>에서 전망한 인류의 미래는 더없이 황량하고 우울하며 비관적이다. 과장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분명한 것은 우리 앞에 놓인 미래에는 새로운 도전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은 영화로 제작된 <로드>의 한 장면. | 경향자료사진

매카시가 <로드>에서 전망한 인류의 미래는 더없이 황량하고 우울하며 비관적이다. 과장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분명한 것은 우리 앞에 놓인 미래에는 새로운 도전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은 영화로 제작된 <로드>의 한 장면. | 경향자료사진

정보사회와 세계화에 담긴 문제들도 심각하다. 정보사회의 진전은 산업구조와 삶의 양식을 긍정적 방향에서 바꿔놓고 있지만, 감시체제의 강화에서 지구적 정보 불평등에 이르기까지 그 그늘 또한 짙어지고 있다. 인류의 미래에서 현재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세계화다.

세계화는 한편에선 국경 없는 경제를 강화시키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선 국가간 불평등은 물론 국가 내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불평등이 해소될 가능성보다는 더욱 증대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 인류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인류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과장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 이미 심각한 상태에 도달해 있거나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인류는 그 해결방안 모색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시적 차원에선 당장 직면한 사회문제들을 해결하는 게 합리적일지 모르겠지만, 거시적 차원에선 이러한 지구적 도전들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게 합리적일 수 있다. 미시적 과제와 거시적 과제의 인식 및 대응방안 모색에서 균형 잡힌 시각이 요구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자는 소년을 보자 두 팔로 끌어안았다. 아, 정말 반갑구나. 여자는 가끔 신에 관해 말하곤 했다. 소년은 신과 말을 하려 했으나, 가장 좋은 건 아버지와 말을 하는 것이었다. 소년은 실제로 아버지와 말을 했으며 잊지도 않았다. 여자는 그것으로 됐다고 했다. 신의 숨은 그의 숨이고 그 숨은 세세토록 사람에서 사람에게로 건네진다고.”

<로드>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바닷가에 도달했지만 그곳 역시 살 만한 곳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죽자 혼자 남겨진 아들이 새롭게 합류하게 된 가족의 부인과 나누는 이야기다.

<로드>에 담긴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자유다. 매카시가 전망한 인류의 미래는 더없이 황량하고 우울하며 비관적이다. 그는 이 어두운 전망 속에서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개인적으로 인류의 미래가 갖게 될 위기를 일방적으로 과장하고 싶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우리 앞에 놓인 미래에는 새로운 도전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새해를 맞아 우리 사회가 과거가 아닌 인류의 미래에도 눈을 돌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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