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감독이 박지성에게 손을 내민 이유는 무엇일까.
사상 첫 원정 8강을 위해 그라운드 위의 확실한 리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의 살아 있는 전설’ 박지성(33·에인트호번)이 지네딘 지단(42·프랑스), 루이스 피구(42·포르투갈)처럼 백의종군할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박지성의 대표팀 복귀 가능성이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홍명보 축구대표팀 감독(45)이 박지성의 대표팀 복귀를 추진한다. 오는 3월 그리스와의 유럽 원정 평가전을 즈음해 박지성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뒤 발탁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
월드컵 3회 연속 득점 금자탑을 세운 박지성은 2011년 1월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A매치 100경기를 채우고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무릎 부상에 대한 우려가 크게 작용했다.
박지성의 아버지 박성종씨는 당시 “지성이는 장시간 비행기를 타면 무릎에 물이 찬다. 대표팀 경기에 다녀와서 열흘 넘게 못뛴 적도 있다”고 호소했고, 팬들도 공감했다. 또 박지성은 자신이 은퇴해야 후배들에게 기회가 더 돌아가고 궁극적으로 한국축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박지성이 빠진 사이 이청용(26·볼턴)과 기성용(25·선덜랜드), 손흥민(22·레버쿠젠) 등이 쑥쑥 성장했다. 이후 박지성은 거듭된 대표팀 복귀 질문에 “은퇴 번복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에인트호번 박지성이 AC밀란과의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드리블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홍 감독이 브라질 월드컵 최종 엔트리 ‘마지막 퍼즐’로 박지성을 점찍었다. 그동안 박지성의 대표팀 복귀 가능성 질문에 “선수가 원하지 않는다면 없다”고 선을 그었던 예전과 다른 입장이다.
홍 감독은 지난 8일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 박지성이 대표팀에 돌아오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채널로부터 전해 들었지만, 아직까지 직접 확인한 것은 없다”면서 “조만간 직접 대화를 나누며 진심을 확인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대면 시점에 대해서는 “3월에 대표팀이 그리스를 상대로 원정 평가전을 치르는 만큼, 그때가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대한축구협회 역시 줄곧 박지성 대표팀 복귀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A매치를 70회 이상 뛴 선수에게는 대표팀 은퇴식을 마련해주지만, 아직 박지성 은퇴경기는 치르지 않았다.
홍 감독이 박지성에게 손을 내민 이유는 무엇일까. 사상 첫 원정 8강을 위해 그라운드 위의 확실한 리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구자철(25·볼프스부르크)과 홍정호(25·아우크스부르크) 등 현 축구대표팀 주축은 2012년 런던올림픽 멤버들이다.
이청용과 손흥민 역시 20대 초·중반이다. 평균연령은 25세 안팎에 불과하다. 홍 감독은 리더십을 겸비한 베테랑을 보강해 패기와 경험의 밸런스를 맞추고 싶어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축구대회인 월드컵은 뜨거운 관심만큼 다양한 변수가 상존하고, 중압감도 엄청나다. 그라운드에서 어린 선수들을 잡아줄 수 있는 경험,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의 위기극복 능력, 유럽파와 국내파를 아우를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베테랑’ 박지성은 이를 두루 갖춘 적임자다. 박지성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주장을 맡아 말보다는 행동하는 리더십을 발휘하며 선수단을 이끌었다.
올 시즌 친정팀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서 전성기 못지않은 활약을 선보여 경기력 면에서도 검증을 마쳤다. 안톤 두 샤트니에 신임 축구대표팀 코치(56·네덜란드)도 9일 “2주 전 네덜란드에서 오베르마스 아약스 기술이사를 만났는데 ‘박지성을 왜 안 데려왔느냐’고 농담을 하더라”며 “박지성은 최근 몇달간 부상을 겪었지만 대표팀에 꼭 필요한 선수다.
유로파리그에서 탈락한 에인트호번이 리그에만 집중해 체력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정규리그는 5월 4일 막을 내리는데 5~8위는 유로파리그 진출팀을 결정할 플레이오프 2경기를 더 치러야 한다. 9일 현재 7위인 에인트호번 소속 박지성은 5월 말까지 경기를 치러 실전감각을 최대로 유지할 수 있다.
프랑스 지단·포르투갈 피구도 번복
특급 스타 중 국가대표 은퇴를 번복하고 조국에 마지막으로 헌신한 사례가 적지 않다. 프랑스의 지단과 포르투갈의 피구는 유로 2004를 마치고 은퇴를 선언했다. 둘 모두 의지가 확고했지만 자국 축구협회와 팬들의 반복된 설득에 마음을 바꿨다. 이들은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나란히 조국의 유니폼을 입었고 프랑스는 준우승, 포르투갈은 4위라는 성과를 거뒀다.
파벨 네드베드(42·체코)도 2006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이 걸린 플레이오프 2경기를 앞두고 은퇴를 번복하고 가세해 16년 만의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스웨덴 헨리크 라르손(43)도 복귀 캠페인을 벌인 축구팬들의 성화에 못이겨 2004년과 2008년 두 차례나 대표팀 은퇴를 번복했다.
한국에서는 최진철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43)이 2004년 아시안컵 직후 대표팀에서 은퇴했다가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복귀했다. 당시 대표팀 코치였던 홍 감독이 최진철의 복귀를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우승 후 소속팀 AS로마에 전념하겠다며 이탈리아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프란체스코 토티(38)도 주요 메이저대회 때마다 대표팀 복귀 요청을 받았다. 그는 “절대라는 건 없다”고 여운을 남겼지만 번번이 거절했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홍명보 축구대표팀 감독이 지난해 12월 브라질 월드컵 조추첨식을 마치고 귀국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무르익은 주변 여건, 본인 결단만 남아
그렇다면 박지성 대표팀 복귀의 실현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한준희 KBS 해설위원은 “박지성의 대표팀 복귀 전제조건은 네 가지다. 감독이 원하느냐, 팀에 상승효과를 가져오느냐, 몸상태가 괜찮으냐, 기존 멤버들이 환영하느냐다”라고 말했다.
한 위원은 “홍 감독은 박지성을 필요로 하고, 박지성이 가세한다면 전술·정신력 측면에서 좋아질 것이다. 박지성은 부상 복귀 후 몸상태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고, 박지성이라면 국내파와 유럽파를 막론하고 후배들이 환영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제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만큼 객관적인 여건은 무르익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 위원은 “물론 박지성의 결정이 선결 조건이다”라고 덧붙였다.
박문성 SBS 해설위원은 “박지성은 대표팀 은퇴 때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다’, ‘대표팀과 소속팀을 병행하면서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이유를 들었다. 만약 두 가지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면 대표팀에 돌아올 수도 있다”며 “대표팀이 꼭 필요로 한다든지, 대표팀이 위기라든지 등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
주위에서 많은 요청들이 있으니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시 고민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지성의 부친 박성종씨는 박지성의 생각이 크게 변한 것은 없을 것이라고 조심스러워하면서도 홍 감독이 직접 박지성과 대화를 한다면 변화가 있을 가능성도 열어뒀다.
결론적으로 박지성의 마음먹기에 달렸다. 박지성은 최근까지도 대표팀 복귀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홍 감독도 “선수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대표팀 컴백을 강요할 순 없다. 그래서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판단은 전적으로 박지성에게 맡기되, 대표팀 감독으로서 전력 보강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홍 감독은 “박지성 자신에게도, 대표팀에도 결정은 빠를수록 좋다”면서 “박지성 발탁 여부가 대표팀 엔트리 구성의 마지막 단계가 될 것 같다”고 귀띔했다. 브라질 월드컵에서 왕의 귀환을 볼 수 있을까. 박지성의 결정만이 남았다.
<박린 일간스포츠 기자 rpark7@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