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일은 책상에 앉아 있을 때는 전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친구들의 움직임이 반장이 되어 교단에 서면 구석구석 잘 보이는 것이다. 국회의원들도 의장이나 상임위 위원장이 되어 단상에 서면 누가 조는지, 딴 생각을 하는지, 심지어 휴대폰으로 장난을 치는지 훤히 보인다고 한다.
최근 박병석 국회부의장이 여야협상과 관련해 ‘분기탱천했다’고 한다. 평소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모범생 같은 외모에 ‘저런 사람도 화를 낼까’란 생각이 들 만큼 온순한 그가 국회부의장이 되어 보니 격노할 만큼 국회 분위기가 엉망이라는 증거다.
여야 최초로 11년 연속으로 경실련이 선정하는 국감 우수의원으로 뽑히고, 한국신문방송기자연맹이 선정하는 ‘2013 한국인물대상 정치부문’의 상을 수상한 모범정치인인 박병석 국회부의장을 만나 여의도 국회정치의 문제점을 들어봤다.
여야협상이 타결되었지만, 의견이 엇갈립니다. 누구는 새누리당의 패배라고 하고, 어디서는 민주당의 패배라고 하고.
“협상에는 승자와 패자가 없습니다. 어느 한편만 승리하면 그건 협상이 아니죠. 국민의 평가는 물론 다르겠지만요. 아무튼 국회에 복귀해 현안을 해결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박병석 국회부의장 “여야 협상 대표단 지도력 너무 약해 화가 났다”](https://img.khan.co.kr/newsmaker/1055/20131217_1055_A29a.jpg)
이번에 여야협상 때는 주변에서 ‘분기탱천했다’는 표현을 하던데요.
“여야 대표단의 지도력이 너무 약한 것에 화가 났습니다. 감사원장과 복지부 장관을 각각 투표하는 순서를 둘러싸고 각 당이 서로를 불신해서 그런 황당한 결과가 나왔고, 결국 국민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여야 지도부가 왜 신사협정을 못맺는가. 순서에 상관없이 투표는 둘 다 하자 등의 합의를 못보는가를 따졌죠. 제가 국회부의장이라 중립을 지키고 당의 문제에 객관적이 되려고 하지만 정말 화가 납니다.”
협상이 그리 어렵습니까.
“저도 큰 협상을 몇 번 중재했습니다. 2008년 민주당 정책위 의장 시절에 당시 한나라당 임태희 정책위 의장과 함께 광우병 파동으로 국회가 78일간 선서도 못하고 파행했을 때 합의서를 만들어 정상화시켰고, 여야 영수회담도 의원회관 제 방에서 성사시켰죠.
4대강 때는 몸싸움까지 할 만큼 험악한 분위기였는데 마지막으로 제가 먼저 4대강 중 하나만 해보고 성공하면 동의하고, 만약 실패하면 거기서 그쳐야 한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여야는 협상을 타결했는데, 한나라당 김성조 당시 정책위 의장이 MB와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았는지 실패로 끝났어요. 여야가 합의해도 청와대의 입김이 작용하면 안 됩니다. 이번에도 혹시 그런 보이지 않는 (청와대의) 조언이 있지 않았나 하는 의혹도 가져봅니다.”
‘자리를 내놓겠다’는 강경발언도 했지만 김한길 대표를 비롯, 민주당 지도부가 너무 허약해 보인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민주당 내에서 스탠스를 정하기가 쉽지 않아요. 국민들은 더 세게 나가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매일 여당 발목만 잡는다고 하고…. 그래도 국민들에게 예측 가능한 정치를 했느냐는 의구심이 듭니다.”
왜 민주당은 분열된 모습만 보일까요.
“이젠 그게 당연한 시대입니다. 대한민국 정당은 박근혜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1인 지도자의 체제는 끝났습니다. 과거 3김 시대처럼 강력한 지도자가 비전을 제시하고 깃발을 들고 ‘나가자!’라고 외치면 따라오던 시대는 지났어요. 하지만 중요한 사안에서는 당과 계파가 아니라 국민을 생각해 합심하는 자세가 필요하지요.”
국회 부의장을 맡은 지도 1년 반이 넘었습니다.
“저는 정치의 중심은 국회여야 한다는 확고한 소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정치가 국회의 중심에 서 있는가 의문이 듭니다.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은 청와대와의 관계설정에 더 신경을 쓰고 있고, 야당도 지도부의 결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여의도정치가 위축되고 제기능을 못해 안타깝고 국회 자체에 대한 자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국회는 새 정부의 국정운영에 지원할 것은 지원하고, 견제할 것은 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새 정부가 문제점과 과제를 해결하고 또 미래지향적 정책을 펼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할 필요성이 있죠. 국회부의장으로서 정부와 국회 간 소통을 중시할 것입니다.”
4선 의원인데 주변에선 초선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고 하더군요. 이번에도 국감 우수의원에 뽑혔고요.
“제가 좀 독한 사람입니다. 제 신조 중 하나가 ‘박병석의 능력은 비평받더라도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난은 받지 말자’입니다. 국회부의장, 민주당 의원, 지역구 관리 등을 모두 다 병립할 수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려고 합니다. 특히 외교통일위원회 소속인데 상임위 활동에는 의석 점유시간으로는 선두자리일 겁니다.”
어느 인터뷰에서보니 하루 수면시간이 3~4시간 정도라던데 안 지칩니까.
“아침에 깨면 항상 기도합니다. 제가 하는 일이 나라와 우리 민족을 위해 부합하는 일이기를요. 또 출근하며 차를 타면서 ‘난 어항 속의 금붕어다. 나의 24시간이 투명하게 공개되니 부끄럽지 않게 살자’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지역구 일로 1년에 KTX를 200~250번씩 탑니다.
물론 피곤하지만 피곤하다는 핑계로 과거에 한 일을 지금 게을리하거나 정치 초심을 잃어서는 안 되지요. 비서진들에게도 ‘혹시 내가 초심을 잃으면 지적해달라’고 당부했어요, 부모님이 물려주신 강건한 체력과 긍정적 사고에, 일에 대한 보람으로 아직 지치지는 않지만 솔직히 개인생활은 전혀 없죠. 그래서 두 아들에게 절대 정치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정치는 무한대 봉사라는 소명의식이 없이는 할 수 없으니까요.”
본인은 그렇다쳐도 비서진들은 무슨 죄(?)입니까. 국감자료도 다 비서진들이 준비할 텐데요.
“그래도 국회의원 가운데 비서진들이 가장 오래 일하는 곳이 우리 의원실입니다. 초선 때부터 계속 일하는 분들이 대부분이고 비서실장은 재선 때 합류했고요. 일은 힘들지만 나의 순수한 동기를 이해하니 다들 열심히 일합니다. 고맙죠.”
외교통일위원회 소속인데 이번 국정원의 장성택 실각 정보가 궁금합니다. 그런 일을 통일부나 외교부가 아니라 국정원이 국회에 제공해 정청래 의원이 발표하는 것이 좀 의아했습니다. 시점도 그렇고요.
“국내 정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서입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잘 되려면 세 가지를 바꿔야 합니다. 첫째는 1987년 체제의 헌법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국가입니다. 절대적 대통령 권한 체제가 바뀌어야 대화와 타협이 가능합니다.
둘째는 분단시대의 잘못된 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일련의 사태는 분단시대 논리에서 나온 일들입니다. 남북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것과 연관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번의 경우 돌발사건, 그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면 모르지만, 왜 지난 일이고 모호한 일인데 발표시점을 그 시간으로 택했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 보도 이후에 ‘국정원의 물타기’란 시각도 큰데, 정보당국이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못받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마지막은 언론입니다. 저도 신문기자 생활을 오래 했는데 요즘은 대한민국 언론이 이래도 되나 싶습니다. 적어도 팩트를 갖고 객관적인 사실만 보도하면 되는데, 칼럼이 아닌 기사에도 자신의 생각과 자사의 이념으로 왜곡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더욱 문제는 보수와 진보 언론이 거의 9대 1의 비율인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박병석 국회부의장 “여야 협상 대표단 지도력 너무 약해 화가 났다”](https://img.khan.co.kr/newsmaker/1055/20131217_1055_A31a.jpg)
그 언론에서 최근 ‘충청도 대망론’에 대한 기사가 자주 나옵니다. 대전에서 내리 4선을 한 충청도의 대표 정치인인데, 정말 그런 흐름이 읽혀집니까.
“그동안 충청도 정치세력은 정치 중심이 아니라 제3세력이나 주변세력, 변수의 역할만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국회에서 강창희 국회의장과 부의장인 제가 다 충청도 출신이고, 인구도 호남을 추월하다보니 그런 희망과 욕구가 함께 나오는 것 같습니다.
충청 대망론이 뜬다고 지역갈등이 생길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지역갈등 완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동안 과소평가되었던 충청도도 대표성을 찾을 필요는 있죠. 갑자기 고건 전 총리가 생각나네요.”
왜 전라도 출신인 고건 총리가 떠오릅니까.
“제가 서울시 부시장으로 일하다 대전에서 출마하겠다니까 당시 고건 시장이 엄청나게 출마를 말렸어요. 현직 서울 부시장이 자민련 텃밭인 대전에 민주당 간판으로 나갔다가 떨어지면 서울시도 타격이라면서요. 나중에 보니 고건 시장이 대통령의 꿈을 꾸고 있어 더 데리고 있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저는 만국적 병폐인 지역감정을 타파하려면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불리한 지역에서 선출직 의원으로 출마하는 정면돌파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계란으로 바위깨기>란 책도 펴냈는데, 그만큼 충청도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당선되기가 어렵다는 의미죠.”
그래도 지역구에서 최다득표로 당선되지 않았나요.
“예, 4자구도인데도 54.5% 득표를 했죠. 대전에서 내리 4선도 여야 최초이고, 국회 부의장 경선 때도 98% 지지를 얻었습니다. 민주화 정부에선 정말 드문 일이죠.”
비결이 뭔가요. 큰소리도 내지 않고 별로 튀는 발언이나 행동도 안 하는데….
“거듭 강조하지만 진정성입니다. 주민들도 제게 ‘한결같다’ ‘변함없다’란 말씀을 합니다. 제 선거구호도 ‘한결같은 사람’이구요. 물론 정치인으로서 톡톡 쏘는 매서운 맛이 없다거나 색깔이 선명하지 않다는 지적도 듣습니다.
전 한결같이 중도개혁론, 즉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중도진보론자입니다. 좌에서 우까지 이념좌표를 그린다면 아마 4.5 정도일 겁니다. 늘 성실하고 일관된 모습 덕분인 것 같습니다.”
대전에서 인기가 높은데 내년 지자체에서 대전시장 차출설이 들립니다.
“4년 전에도 권유를 받았죠. 나라와 대전을 위한 길이 뭔가 깊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대전시장을 하는 것은 우선은 미국 대통령처럼 주지사를 거쳐 대권으로 가는 경우, 그리고 마지막 봉사로 고향인 대전을 위해 제 경험과 경륜을 대전시장직에 다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아직은 둘 다 아닌 것 같아요. 예산지원을 포함해 국회의원으로 중앙당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고, 상임위 활동을 통해 국가에 봉사할 일도 더 많습니다. 그런데 새누리당에서도 자꾸 출마 여부를 물어보네요….”
내년 지자체에선 아직 정식 출범하지 않은 안철수 신당의 행보가 가장 변수일 듯합니다. 대중들은 안 의원이 주장하는 ‘새정치’에 기대가 큰 것 같습니다.
“현 정치권이 국민들의 기대에 못미쳐서 새정치에 대한 욕구가 클 겁니다. 그런데 절대적 대통령 중심제의 틀을 안 바꾸면 새정치도 불가능합니다. 국민들 눈에는 매일 싸우는 것 같이 보이지만, 여야가 타협이 되려면 당정이 분리돼야 하고 청와대, 즉 대통령의 무소불위한 권력이 분산되어야 합니다.
사반세기 전에 만들어진 헌법은 이제 개정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새 정치를 표방하는 새 정당이 생겨도 이런 절대권력 아래에서는 개선은 몰라도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헌법개정은 대통령의 결심이 중요합니다. 정권 초기에는 권력이 막강하니 개헌을 논의하지 않고, 힘빠질 때 개헌하자고 해봐야 추진력이 약해 유야무야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지 1년입니다.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궁금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누구보다 이 정부가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게 국가와 국민을 위한 길이니까요. 다만, 재임시가 아니라 당선되기 전의 일이라 해도 국정원 등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사건에 대해서는 사죄를 하는 등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남겨야 합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60년 전의 나치 희생자 묘비에 꽃을 바친 것은 자신의 책임이어서가 아니라 현 독일 총리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은 개인 박근혜가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분명한 선을 그어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제가 지난 4월에 청와대에서 함께 식사하며 대화했는데, 진솔하게 이야기하면 충분히 납득할 분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주변에 그런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없나봅니다.”
이렇게 일만 하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곁에 있던 비서실장에게) 제가 무슨 재미로 살죠? 자투리시간을 활용해 아내와 영화는 자주 봅니다. 아내도 제가 공직에서 물러나면 뭐하며 지낼지 걱정스럽다더군요. 취미도 없고 사적으로 친구도 잘 못만나고….
전 해마다 새해 첫 날에 10년 후에는 뭘할까를 생각하는데, 미리 생각해보면 아마 평양 대동강변에 앉아 ‘그래도 내가 남북화해에 기여했다’며 미소지을 것 같아요. 아, 그건 재미있는 일은 아니군요.”
박병석 부의장은 국회의사당 본청 입구까지 따라나와 깍듯하게 배웅을 해주었다. 그의 모범적인 의회활동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사소한 일에 마음이 움직인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