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는 사태의 일단락을 의미한다.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고, 논란도 가라앉는다. 하지만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실종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 사건은 검찰의 수사가 일단락됐는데도 불구하고 좀처럼 불씨가 꺼지지 않는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초본 삭제를 이유로 검찰이 기소한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은 “노 대통령의 삭제·은폐 지시도 없었고, 초본은 당연히 폐기하고 정리된 원본만 기록물로 보관하는데, 만약에 유죄로 된다면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공무원들이 상당히 당황스러우실 것 같다”고 검찰 발표를 정면으로 부인했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이병완 노무현재단 이사장 “정상회의록 장물아비는 놔두고 신고한 사람만 족쳐”](https://img.khan.co.kr/newsmaker/1053/20131203_1053_A24a.jpg)
노 전 대통령의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이병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검찰의 무리한 짜깁기 수사이며, 이 정부의 패륜적인 일”이라고 분노했다.
이에 맞서 이명박 정부 통일비서관 출신의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은 “명백한 사초 실종이다. 노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한 것도 맞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검찰 수사 발표에도 불구하고 여권과 노 전 대통령 측의 공방은 계속되고 있다. 대체 무엇이 진실일까. 그리고 우리 정치권은 언제나 노 전 대통령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노 전 대통령의 ‘그림자’ ‘통역가’로 알려진 이병완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서울 마포의 노무현재단에서 만났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등장했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사건은 1년을 넘겼고, 정치권에서도 어찌 전개될지 모르겠다고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된 사건은 2008년 퇴임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고 있다. 모든 게 정치적 이유다. 이번 사건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도둑과 장물아비는 백주에 활보하는데 신고한 사람만 족치는 꼴’이다. 국가기밀인 회의록을 무단 유출한 발설자를 잡아다 조사하면 된다. 그런데 그걸 안 하고 거꾸로 하고, 그걸 덮고 제대로 안 해서 일주일이면 다 끝날 수 있는 문제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거다.”
회의록 유출이 더 문제라는 것인가.
“그렇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원본은 음성파일로 국정원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 국가기록원에 국가기록물로 이관되면 대통령 기록물법에 의해 당시 대통령만 볼 수 있고 15년에서 30년 정도 봉인된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후임 대통령도 남북관계에 참고할 수 있도록 배려 차원에서 국정원에 보관토록 했다. 국정원에서 대여받아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정치권에서 정략적 목적으로 ‘노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해서 천암함 사건까지 일어났다’는 주장을 했다. 노 대통령이 직접 NLL 포기를 말했다면 왜 북측에서 그걸 그동안 언급하거나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았을까. 또 김무성 의원은 찌라시 정보지로 봤다는데 어떻게 국가기록물, 특히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찌라시로 유출될 수 있나. 최초 발설자인 정문헌 의원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 자료를 봤는지를 조사하는 게 우선이다.”
검찰은 초본을 불법 삭제했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조명관 비서관이 지적했듯 먼저 짚어야 할 것은 초본이 이관할 대상이냐 아니냐, 대통령기록물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다. 녹취록 초본은 대통령기록물이 아니어서 이관할 대상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너무 고맙게도 검찰 자료를 보고 우리도 반박이 가능했다. 검찰 자료가 없었으면 우리도 대응할 방법이 없었을 게다.
검찰이 그때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던 자료, 즉 ‘녹취록에 이런 저런 하자가 있고, 잘못 표기된 것도 있고 그러니까 한 자 한 자 정확히 해서 정확한 회의록으로 만들어서 등재해 달라’고 지시한 사실을 검찰 자료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된 거다.
노 대통령이 회의록을 삭제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자료 아닌가. 우리들은 ‘검찰 고위층은 어떤지 모르나 실무검사들은 정말 수사가 안 된다고 생각하고 우리한테 이렇게 준 거 아니냐’란 우스갯소리까지 했다.”
그런데도 검찰은 초본을 의도적으로 삭제했다고 결론 내렸는데.
“노무현 정부의 특징은 종이 즉, 문서를 없앤 것이다. e지원 시스템을 만들어 모든 보고자료나 회의록, 논의 내용들을 컴퓨터에 파일로 남긴다. 하지만 청와대 수석이나 비서관들도 자신의 분야에서만 일해서 전체 자료가 어떻게 흘러가고 보관되는지는 잘 모른다. 남북정상 회의록의 경우, 노 대통령이 녹취록을 한 자 한 자 정리해 사실관계가 다른 것을 바로잡아 완성본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초본이 사라지고 내용이 수정되었다고 하니 귀신이 곡할 노릇인데, 검찰 자료를 보고 우리도 이런 과정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았다. 조명균 비서관은 대통령으로부터 삭제 지시를 받은 적도 없는데 고의로 삭제하고 은폐했다는 이유로 기소됐다.
정말 이런 문제를 설명하기도 구차하고 지긋지긋하다. 그래도 전직 대통령인데 ‘금도’란 표현조차 사치스럽다. 민주주의가 왜 소중한지를 이제 알 것 같다. 마치 현재 권력층이 ‘이게 정치야, 이게 권력이라구’라고 강조하는 것 같다.”
일각에서는 지난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문재인 의원이 노 대통령 최측근이자 비서실장이어서라는 의견도 있다. 노 대통령을 흠집내야 문재인 의원이 타격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국정원 댓글 사건과 관련한 민주당과 문재인 의원의 주장을 ‘대선 불복’이라고 한다.
“정치란 전술과 전략이 아니라 세상을 좀 더 바르게 만들고, 민주주의에 충실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대선 불복이 아니라 국정원이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것, 명백한 관권 개입을 비판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관권 개입 타파를 위한 투쟁의 역사다. 고무신·막걸리 선거가 과거 관권 개입이었다면 디지틀 시대엔 댓글이나 트위터가 명백한 관권 개입이다. 전 국민이 컴퓨터와 휴대폰을 사용하는데 그들을 상대로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했다. 이걸 어떻게 묵과하나.
문재인 의원은 이해당사자 이전에 정치인으로 나서야 했다. 그걸 당이 같이 토론하고 호흡을 맞춰야 하는데 매끄럽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정치인들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당신들의 책무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그런데 왜 민주당은 지지도가 그리 낮은가.
“너무 엄혹한 시대상황이라 야당을 보는 시선이 왜곡된 것 같다. 하루 종일 보수편향적인 종편에서 편파적인 정치 논평을 하고 지상파인 MBC는 뉴스데스크에서 조 비서관 기자회견을 보도도 하지 않았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의 좋은 면, 알리고 싶은 부분이 국민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물론 민주당도 반성할 일이 많다.”
민주당은 친노와 비노로 양분되어 더욱 분열된 이미지로 보이는 것 같다.
“친노는 적어도 정치세력은 아니다. 친노의 기준을 참여정부에서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혹은 각료였던 사람을 칭한다면 현재 국회에 몇 명이나 되나. 쉽게 말하면 한 줌도 안 되는 규모다. 그런데 수시로 친노가 문제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선거철이면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주장하니….”
노 대통령 4주기 때 ‘이제 반노가 되자’며 ‘노무현 대통령은 스스로를 배반한 반노다’란 표현을 했다.
“역설적 표현이다. 친노를 종북주의자, 좌파, 패권주의자로 보는 이들이 많다. 이건 모두 정치적·이념적 산물이다. 그런 개념에서 본다면 노 대통령이야말로 가장 반노적인 사람이다. 친노를 분열론자로 보지만 그는 뼛속까지 통합주의자였다. 야당에게 권력의 대부분을 내주는 ‘대연정’을 실행하려고 했다. 18년 박정희 정권도 못 이룬 신행정수도를 건설해 수도권과 지방의 균형발전을 밀어붙였다.
어느 정권보다 국방비를 증액하고, 튼튼한 자주국방의 마스터플랜을 수립했다. 국방개혁 ‘2020’ 플랜을 만들었고, 끈질긴 로비에도 잠실 제2롯데월드 건설을 불허했다. 그의 재임 5년 동안, 단 한 명의 국군 전사자가 없었다. 그는 진보와 보수를 초월해 국익과 국민 우선의 정책을 추구한 합리주의자였다. 돈 안 쓰는 선거를 실현했고,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고, 한·미 FTA를 시작했다.
노무현은 ‘되돌아본 미래’다. 그래서 친노에게 ‘노무현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라. 그래서 노무현 정신을 반의 반만이라도 실천하라’고 강조한다.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그토록 문제가 많았다면 매달 후원금을 내는 회원이 4만명인 노무현재단이 어떻게 존재하고, 왜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누르고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1위에 오르겠나.”
![[유인경이 만난 사람]이병완 노무현재단 이사장 “정상회의록 장물아비는 놔두고 신고한 사람만 족쳐”](https://img.khan.co.kr/newsmaker/1053/20131203_1053_A27a.jpg)
노 대통령과는 어떤 인연인가.
“2000년 9월까지 전혀 사적인 관계가 없었다. 김대중 정부 비서관 시절에 ‘3김 시대가 끝나면 어떤 유형의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이끌어가야 하나’를 주변 사람들과 논의했다. 당시 노무현은 대통령 후보감으로 거론되지도 않았다. 존재감이 없었다.
그런데 그의 인생역정과 정치철학을 알고 내가 먼저 요청해 만났다. 대통령감으로 주목하고 있다는 말에도 별로 감동하거나 고맙다는 말도 없었다. 그런데 계속 토론하는 과정에서 시대정신에 맞는 지도자란 확신을 가졌다. 그 확신은 지금도 변함없다.”
참여정부 시절 최장수 비서실장이었다.
“2005년 8월부터 2007년 3월까지 비서실장을 했다. 내가 비서실장이 될 줄도 몰랐다. 대부분 장관 출신에 3·4선 의원의 경력이 있어야 하는 자리인데 비서관-수석비서관-비서실장이 된 건 내가 최초다.
비서실장 자리는 정신적·육체적으로 정말 다 소진되는, 24시간 국정의 불침번을 서는 자리다. 정말 힘든 자리인데 70대 중반에 60년대의 정서인 김기춘 실장이 맡고 있으니 대단하다. 실장은 경륜만으로 하는 자리는 아닌데….”
당시의 수석비서관 회의 풍경은 어땠나. 요즘 수석들은 다들 고개 숙이고 받아 적기만 해서 ‘적자 생존’이란 말이 있다.
“그 당시는 ‘듣자 생존’이었다. 남의 말을 들어야 했다. 대통령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가 받아 적는 걸 아주 싫어해 뭔가 적고 있으면 ‘아, 내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아뇨’라고 지적했다.
서로 얼굴을 보고 눈을 마주치고 표정에 담긴 속뜻을 알아야 서로의 본뜻이 전달된다며 잘 들을 것을 강조했다. 4급행정관들까지 배석해서 경우에 따라 담당행정관이 실무나 실질적인 내용을 전했다. 또 반박과 반론도 뜨거웠다.
‘듣고만 있으면 어쩝니까. 의견을 얘기하세요’라고 해서 각자 의견을 기탄없이 말했다. 물론 초기엔 국무회의 같은 데서 누가 어떤 순서로 발언할지 정한 큐시트가 있었지만 곧 사라졌다. 각료들은 언제 자신에게 질문을 할지 몰라 열심히 준비해 왔다.”
가장 격렬한 토의가 이뤄진 사안은 뭐였나.
“이라크 파병이다. 토론을 몇 번이고 계속 이어갔다. 결국 1년에 걸쳐 외교적 국익, 국민 여론을 수렴하며 자이툰부대를 보내고 차츰 파병을 확대했다.
노 대통령은 토론을 하는 이유를 ‘하자’를 줄이는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것보다 토론과정에서 결점과 실수를 줄일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해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많이 들었다.”
현재 광주 서구의 구의원이다. 구의원 생활은 어떤가.
“솔직히 로망을 갖고 시작했다. 지방자치제를 성공적으로 실천하는 독일, 일본 사례만 보고 풀뿌리 민주정치를 해보고 싶었다. 마을 단위 공회당에서 어른아이 모여서 지역문제를 활발히 토론하는…. 그런 꿈은 금방 산산조각났다.
구의회는 국가행정의 말단조직이다. 난 지자체를 실핏줄로 표현하는데 중앙권력의 역할이 너무 크고 방대해 실핏줄까지 미치지 않는다. 국회의원들은 시·구의원들이 하는 일 없이 해외관광이나 다닌다고 비판하는데, 자기 동네 구의원이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예산 심의나 편성도 중요하지만 난 중앙정치가 안 바꾸는 지역구도를 우리가 바꾸자고 강조한다. 광주에서 새누리당 의원이 당선되면 안 되나. 특히 광주는 민주, 민권, 평화의 상징적인 곳인데 부산과 대구가 바뀌기 전에 우리부터 먼저 변하자고 강조한다.”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
“일단 노무현재단을 더 실속 있고 아름답게 키우는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참 더디 간다. 박근혜 정부가 아직 1년도 안 지나갔다. 굉장히 오래 집권한 것 같은데….”
이런 저런 사건들로 너무 답답하고 속상하다며 담배를 계속 피우면서도 그는 행복해 보였다. 그리운 사람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고, 그를 위한 일을 하는 사람이니 분명 행복할 게다. 그런데 그와 인터뷰를 하면서 엉뚱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김무성 의원은 찌라시를 보고 그런 주장을 했다는데, 다른 그의 발언도 다 찌라시에서 나온 걸까?’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