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거인’ 김신욱 ‘진화의 거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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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욱은 10월 20일과 27일 서울과의 2연전에서 발기술을 이용해 2골을 넣었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이 인기다. 인간들이 성벽을 파괴하는 식인 거인에 맞서는 내용이다. 프로축구판 ‘진격의 거인’ 스토리는 좀 다르다. 키 196.7㎝ 장신 공격수가 K리그 클래식을 평정하는 내용이다.

K리그의 ‘진격의 거인’은 김신욱(25·울산 현대)이다. 김신욱은 올 시즌 18골(6도움)로 득점 1위를 달리며 팀의 선두행진(19승7무7패·승점 64)을 견인하고 있다(11월 1일 현재). 울산은 올 시즌 6경기를 남기고 2위 포항에 승점 5점을 앞서며 통산 세 번째 우승을 향해 진군 중이다. ‘진격의 거인’이라는 애칭이 아깝지 않은 활약상이다. 진격의 거인이 더 무서운 건 최근 진화의 거인으로 매경기 업그레이드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신욱을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으로 패러디한 사진. | 울산 현대 제공

김신욱을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으로 패러디한 사진. | 울산 현대 제공

김신욱은 과천고등학교 시절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했고, 중앙대학교에선 수비수로 뛰었다. 김호곤 울산 감독은 2009년 프로에 입단한 김신욱을 공격수로 보직 변경시켰다. 2009년 염기훈(현재 수원), 이진호(대구) 등 공격수가 줄부상을 당해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그게 신의 한 수가 됐다. 김신욱은 마치 성장판이 열린 아이처럼 쑥쑥 컸다. 2009년 7골, 2010년 10골, 2011년 19골, 2012년 13골을 뽑아냈다. 특히 지난해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 6골을 터트려 우승을 이끌었다.

올해 김신욱은 ‘K리그 언터처블’(untouchable)로 또 한 번 진화했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레알 마드리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메수트 외칠(아스널), 이탈리아 세리에A의 주세페 로시(피오렌티나)처럼 리그에서 막기가 가장 까다로운 선수다. K리그 5년차에 벌써 67골을 넣어 이동국(전북)의 K리그 최다골(153골)을 깰 수 있는 선수로 꼽히고 있다.

꺽다리 수비수, K리그 최고 공격수 되다
김신욱은 축구실력만큼 스타 기질도 갖췄다. 팬들을 향한 진심어린 서비스로 유명하다. 김신욱은 지난 8월 자신의 슛을 맞고 깁스를 한 소녀를 경기장에 초대했다. 자신의 광팬인 소녀가 한 달 전 홈경기 관중석에서 본인이 찬 공에 맞아 깁스한 것을 뒤늦게 알고 매우 미안해하며 가족석을 잡아준 것이다.

김신욱이 골을 넣은 뒤 양쪽 검지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 울산 현대 제공

김신욱이 골을 넣은 뒤 양쪽 검지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 울산 현대 제공

경기 후 소녀와 사진도 찍고 사인볼도 줬다. 원래 김신욱은 자신을 태우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가족의 차가 30분 넘게 기다리고 있어도 끝까지 남아 단 한 명의 팬도 빼놓지 않고 사인을 일일이 해주는 ‘멘탈갑(甲)’이다.

김신욱에게 지난 여름은 너무도 추웠다. 김신욱은 지난 7월 홍명보 신임 대표팀 감독이 첫 지휘한 동아시안컵 세 경기에 조커로 출전했지만 침묵했다. 홍 감독이 강조하는 패스 앤드 무브 축구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 선수들이 김신욱만 들어오면 너무 띄우는 패스만 해서 뻥축구 논란의 중심에 섰다. 홍 감독은 일본과의 3차전에서 1-2로 패한 뒤 “김신욱이 들어오면 플레이가 단순해진다. 경기 종료 15분을 남겨두고 전술을 상대에게 알려준다면 치명적일 수 있다”고 혹평했다. 홍 감독은 이후 치른 페루·아이티·크로아티아·브라질·말리와의 평가전에서 김신욱을 호출하지 않았다.

지난 2010년 1월 첫 태극마크를 단 김신욱은 허정무, 조광래, 최강희 전 대표팀 감독체제에서 선발과 조커로 중용됐다. 특히 최강희 전 대표팀 감독 시절 2014년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운명의 7·8차전에 선발 출전할 만큼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

대표 탈락은 탄탄대로를 달리던 김신욱에겐 충격이었고 시련이었다. 게다가 지난 여름 이적시장에서 고대하던 유럽 진출 꿈도 불발에 그쳤다. 프랑크푸르트(독일)와 벤피카(포르투갈), 웨스트브로미치(잉글랜드), 셀틱(스코틀랜드) 등이 관심을 나타냈지만 병역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했다.

1988년생인 김신욱이 유럽팀에 입단하면 한 시즌 뛰고 상무에 입대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유럽팀들이 난색을 표했다. 동력을 잃어서인지 김신욱은 8월과 9월 고공폭격기 화력까지 약해졌다. 대표팀 탈락과 유럽 진출 불발로 슬럼프가 찾아온 게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왔다.

진격하던 거인 앞에 닥친 첫 성벽, 홍명보의 외면
김신욱은 올 가을 절치부심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홍명보 스타일’에 맞춰갔다. 10월 말 울산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김신욱은 “‘내 축구의 한계인가’라는 딜레마가 왔다. 결론은 내가 부족해서였다. 홍명보 감독님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김신욱은 박주영(아스널)을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김신욱은 “이근호(상주) 형 말대로 홍명보 감독님이 원하는 공격수는 박주영 선수다. 동료들과 연계 플레이 등 한국에서 가장 완벽한 스트라이커다”라고 말했다. 박주영은 홍 감독이 지휘한 2012년 런던올림픽 축구대표팀 주전 원톱이었다. 당시 박주영은 골 결정력과 전후좌우 폭넓은 움직임을 선보여 홍 감독을 흡족하게 했다.

경기 후 박수를 치고 있는 김신욱. | 울산 현대 제공

경기 후 박수를 치고 있는 김신욱. | 울산 현대 제공

김신욱은 동영상을 통해 박주영의 플레이 스타일을 연구하며 닮기 위해 노력했다. 9월 초부터 일본인 도이자키 울산 피지컬 코치와 특별훈련도 실시했다. 클럽하우스 돌계단 30칸을 한 발로 두 칸씩 뛰어오르기, 가랑이 사이에 의자를 끼고 앉아 있다가 의자에 올라가기 등이다. 발목 근육 강화로 밸런스를 맞추고, 제자리 헤딩 대신 점프 헤딩으로 공중볼을 따내기 위해 요가 못지않은 독특한 동작을 반복했다. 그 덕분에 유연한 몸동작과 점프력이 생겼고, 활동량이 많아졌다.

김신욱은 10월 20일과 27일 서울과의 2연전에서 발기술을 이용해 2골을 넣었다. 감아차기 골과 슬라이딩 골을 선보이며 홍 감독에게 헤딩만 할 줄 아는 선수가 아니라고 무언시위했다. 울산 레전드인 유상철 전 대전 감독은 “신욱이는 대전 사령탑 시절 상대했을 때보다 발 밑 기술과 활동량이 많아져 더 강해진 느낌이다”라고 칭찬했다.

키는 다시 홍(洪)에게로
축구대표팀은 11월 두 차례 평가전을 치른다. 올해 마지막 A매치다. 1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스위스전이 확정됐고, 19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선 러시아와 맞붙는다. 진화한 김신욱의 대표팀 재발탁 여론이 뜨겁다. 홍 감독은 4일 대표팀 명단을 발표한다. 김신욱의 이름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최근 1년 7개월 만에 아스널 1군 경기를 치른 박주영이 대표팀에 복귀하면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

김호곤 울산 감독은 “월드컵 본선까지 8개월이나 남았다. 신욱이는 확실한 개성이 있고 조건도 좋다. 지금부터 머리 아프게 대표팀 재승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애제자에게 여유를 강조하고 있다.

김신욱이 지금처럼 노력하고 진화하고 홍 감독의 축구철학에 맞춰가고 있다면, 김신욱은 김 감독 말처럼 대표 소집 때마다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홍 감독도 진화하는 ‘진격의 거인’을 계속해서 외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에.

<박린 일간스포츠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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