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직접 책임져라” 검찰 고발·구상권 청구 움직임
손해배상 받아내지 못하더라도 국민소송제 공론화 계기될 듯
4대강 사업에 대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4대강 사업이 감사원 감사 결과 입찰담합과 정경유착, 부실공사 등 총체적 부실사업으로 드러난 데 이어 국정감사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감사원을 동원해 공무원들이 4대강 관련 일을 하다 실수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문건까지 공개되면서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책임론이 거세지고 있다.
법원서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아
시민단체 일각에서는 사법처리는 물론 소송을 통해 이 전 대통령 등 4대강 사업과 관련된 고위 인사들에게 직접 사업비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10월 2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4대강 길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진을 올렸다. | 이명박 페이스북
하지만 현행법상으로는 손해배상을 이끌어내기 어려워 국민소송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민소송법은 정책결정자들의 잘못으로 예산이 낭비되거나 권한의 남용 등으로 국가나 개인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국민이 소송의 당사자가 돼 직접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제도다.
예산낭비 방지를 위한 국민소송법 제정 네트워크(국민소송네트워크)의 최재홍 변호사는 “이명박 전 대통령 등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소송네트워크는 10월 22일 회의를 통해 이 전 대통령 등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실제로 진행할지 여부와 구체적인 소장 내용을 논의할 예정이다.
이와 별개로 4대강 복원 범국민대책위원회(4대강범대위)는 이 전 대통령 및 4대강 사업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전·현직 공무원들을 22일 검찰에 고발할 예정이다.
지난 7월에는 통합진보당에서 이 전 대통령과 정종환 전 국토부 장관 등 5명을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4대강범대위와 통합진보당이 피고들에게 적용한 혐의는 업무상 배임, 입찰방해 방조, 직권남용, 직무유기 등이다.
4대강범대위측은 “전직 대통령, 장관뿐만 아니라 실무자급으로까지 피고발인의 범위를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피고발인이 확정되면 그 인원이 수십명에 이를 것”이라고 밝혔다.
설령 이 전 대통령이 사법처리가 된다 해도 4대강 사업에 들어간 22조원의 세금을 환수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당장 4대강범대위, 통합진보당의 고발에도 4대강 관련자들에 대한 손해배상은 포함되지 않았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한 변호사는 “국민이 직접 이 전 대통령이나 4대강 관련 공무원들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 국민소송네트워크의 소송은 현실적으로 이길 수가 없다”며 “4대강 사업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등을 주장할 순 있지만 법정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법률 전문가들은 현행법의 틀 안에서 4대강 사업 핵심 인사들에게 예산을 환수받으려면 4대강 사업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본 사람이 손해배상 청구를 내는 방법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예를 들면 보 설치로 인해 지하수 수위가 예상보다 높아져 한 해 농사를 망친 농민이 자신의 피해액을 국가에 청구하는 경우다. 피해 농민이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받아낼 경우, 국가는 다시 이 전 대통령 등에게 구상권을 청구할 수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국민소송네트워크도 현재로선 이 전 대통령에게 직접적인 손해배상을 받아내기 어렵다는 점은 알고 있다. 최재홍 변호사는 “현행법을 볼 때 시민단체의 손해배상 청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0년 하남국제환경박람회 주민소송 운동을 예로 들었다. 당시 시민단체들은 손영채 하남시장이 박람회 운영을 방만하게 하는 과정에서 186억여원의 세금을 낭비했다며 이를 환수하겠다는 취지의 소송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듬해 수원지법은 주민소송의 법률적 근거가 없다며 소송을 각하했다.
최 변호사는 “하남시 주민소송 운동이 훗날 주민소송제 제도화의 기반이 되었다”며 “이 전 대통령을 상대로 한 국민소송네트워크의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승·패소 여부와 관계없이 국민소송제 제도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4대강 사업으로 직접 피해를 본 사람들은 보상 등의 문제가 걸려 있어 실제 소송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국민소송제가 도입돼야 잘못된 예산낭비를 바로잡는 길이 열린다”고 말했다.
국책사업 국민감시 제도 필요
현행법으로는 공무원의 위법이나 과실로 재정에 손해가 난 경우 국가나 지자체가 직접 해당 공무원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를 해야 한다. 2006년부터 시행된 지방자치법상 주민소송제는 국가나 지자체가 손해배상을 진행하지 않으면 국민 세금을 돌려받을 방법이 사실상 전무하다는 문제인식에서 출발했다.
주민소송제를 통해 지역주민들은 지자체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이때 주민들은 지자체장으로 하여금 위법한 행위를 한 공무원이나 관련자들에게 손해배상 청구 등을 진행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2006년 당시 정부 사법제도개혁추진위도 주민소송제를 국민소송제로 확대하는 안을 논의한 바 있다. 하지만 소송 남발 등을 우려하는 정부측 위원들의 입장이 관철돼 결국 국민소송제는 없던 일이 됐다.
경기도 용인시민들의 용인 경전철 사업 예산 환수운동은 주민소송제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지난 10일 용인 경전철 소송단 400여명은 김학규 용인시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단은 소송을 통해 김 시장이 사업 결정에 책임이 있는 전·현직 공무원들에게 1조127억원에 달하는 전체 사업비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라고 요구했다.
소송단의 공동대표 현근택 변호사는 주민소송제가 확대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에 국민소송네트워크에 참여했다. 현 변호사는 “용인 경전철과 같은 지방재정사업뿐만 아니라 국책사업에도 국민들이 감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며 “국민소송제가 도입되면 4대강 사업 등에 대해 손해배상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시민단체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는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시민단체 소속 변호사는 “친일재산환수법만 해도 재산권을 둘러싼 위헌 논란이 있었는데, 공무원이 소신을 갖고 한 일로 개인재산을 빼앗으면 큰 논란이 생길 수 있다”며 “일단 4대강 사업에 대한 형사고발 결과를 보고 난 뒤 국가가 나서서 이 전 대통령 등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하라고 요구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 국민소송제 법안은 민주당 김현미·이상민 의원실에서 준비하고 있다. 김현미 의원실 관계자는 “22일 정도 법안 최종 검토가 끝나면 바로 발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국민소송제는 기존 주민소송제와 달리 직접적 소송방식을 채택할 전망이다. 국민소송제 법안 준비에 참여하고 있는 조수진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실행위원(변호사)은 “지금의 주민소송제처럼 똑같은 취지의 소송을 두 번씩이나 할 필요가 없다. 국민소송제는 일정 요건을 갖춘 납세자 본인이 행정기관이나 공무원에게 직접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미국의 사례를 참고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 9월 27일 김현미·이상민 의원실 주관으로 열린 입법공청회 자료에 따르면, 1987년부터 2011년까지 미국에서 국민소송제로 환수된 예산은 200억 달러(약 21조2000억원)가 조금 넘는다. 같은 기간 중 총 7843건의 소송이 진행됐다.
조 위원은 “복지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면서 예산낭비를 막아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며 “이번 정부도 재정낭비를 막겠다는 의지를 밝힌 만큼 빠른 시일 내에 국민소송제에 대한 공론화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백철 기자 pudmake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