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게 가장 영예로운 평가는 ‘그의 시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해방 이후 우리 작가들 중 이런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시인 김수영이야말로 ‘김수영 시대’라는 명칭이 가능한 작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더니즘과 자유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김수영은 1950년대 후반 이후 우리 문화와 예술의 최전선에 서 있었고, 이러한 그의 위치는 1968년 그가 돌연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계속됐다.

많은 사람들이 4·19를 혁명이라 부르는 것은 4월혁명에 담긴 역사적 의미가 심대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1960년 4월, 연세대에서 시위에 나선 학생들. | 경향자료 사진
뿐만 아니라 그의 놀라운 시들과 탁월한 시론은 1970년대 이후 우리 시문학의 한 흐름을 이뤄온 황동규, 정현종, 황지우 등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 영향은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수영의 시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 4월이 그의 시를 읽기에 가장 적절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은 4월혁명의 시인이다.
“자유를 위해서 /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 사람이면 알지 / 노고지리가 / 무엇을 보고 / 노래하는가를 /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 혁명은 / 왜 고독한 것인가를”
4월혁명을 주제로 쓴 김수영의 시들 중 절창이라 할 수 있는 <푸른 하늘을>이다. <푸른 하늘을>은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와 함께 4월혁명을 노래한 가장 뛰어난 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1960년 6월 15일에 쓰인 이 시에는 자유를 얻기 위해 치러야 했던 4월혁명의 숭고한 희생과 혁명에 담긴 고결한 의미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에 대한 김수영의 생각이 잘 담겨 있다.
올 4월 19일은 4·19혁명 53주년이 된다. 4월혁명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나는 4월혁명이 일어나던 1960년에 태어났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초·중·고등학교를 다녔고, 1979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4월혁명이 우리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를 정직하게 말하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오히려 민족중흥과 조국근대화를 내걸었던 5·16 쿠데타에 더 익숙해 있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와 4월혁명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면서 4월혁명의 의미와 의의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김수영전집(시) | 민음사 제공
엄격히 볼 때 4월혁명을 ‘혁명’이라 부르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혁명이 정치·경제적 구조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변화가 사실 크지 않았다는 점에서 4월혁명을 혁명으로 명명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4월혁명을 혁명이라 부르는 것은 4월혁명에 담긴 역사적 의미가 심대하기 때문이다. 지난 20세기 후반의 우리 현대사에서 4월혁명은 한국 민주주의의 중대한 출발점을 이뤘다. 시민사회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시작한 4월혁명은 연이은 정치사회의 민주화와 함께 통일운동과 노동운동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4월혁명이 지니는 의의 가운데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시민사회 저항이 성공한 최초의 경험이었다는 데 있다. 성공한 사회운동인 만큼 4월혁명은 이후 사회운동에 계속 큰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4월혁명의 주도 이념인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는 19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반독재·반외세 사회운동의 이념적 지반을 제공했고, 혁명에 대한 집합적 기억은 이후 시민사회의 저항에서 정서적 공감대의 원천을 이뤄 왔다.
내가 지금 주목하고 싶은 것은 4월혁명의 현재적 의미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 시대를 열었던 1987년 6월항쟁은 4월혁명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었다. 6월항쟁은 주도세력과 이념에서 4월혁명을 직접 계승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개과정 또한 유사한 경로로 진행됐다.
역사를 거시적으로 보면, 분단체제 성립과 한국전쟁으로 결빙된 시민사회가 4월혁명을 통해 해빙하기 시작했다면 6월항쟁을 통해 이 시민사회는 부활했고 더욱 성숙해 왔다. 이러한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평등에 대한 열망이 6월항쟁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1980년대 후반 이후 노동운동, 통일운동, 무엇보다 다양한 시민운동의 성장과 발전으로 나타났다.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가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특징을 이뤄 왔다는 점이다. 정치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사회운동으로 표출하는 것은 세계사적 흐름을 지켜볼 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 다시 말해 운동정치가 정치사회 내의 정당정치로 제도화하지 못할 경우 그 사회의 민주주의는 더디게 발전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운동정치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 시민사회의 재정치화를 가져오지만, 제도정치에 대한 일련의 실망은 시민사회의 탈정치화를 강화시킨다. 4월혁명과 6월항쟁이라는 소중한 집합적 기억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의 현실에 대해 시민 다수가 결코 작지 않은 불만을 갖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운동정치와 제도정치를 어떻게 생산적으로 결합시킬 것인가는 4월혁명의 53주년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해법을 찾아야 할 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수영으로 돌아가면 이승을 하직하기 전 해인 1967년 2월 15일 그는 <사랑의 변주곡>을 썼다.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 … / 복사씨와 살구씨가 / 한 번은 이렇게 /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뜻하는 바는 지금 함께 살아가는 이 땅의 평범한 시민들일 것이다. 그들이 열망하는 것은 욕망과 광신을 넘어 존재하는 진정한 사랑,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 열망을 4월혁명에서, 6월항쟁에서, 그리고 2008년 촛불집회에서 우리는 발견하고 확인한 바 있다. 더 없이 황량했던 전후 문화사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시대를 열었던 김수영. 1968년 6월 16일 예기찮은 그의 죽음이 여전히 안타깝다. 빛나는 4월을 맞이해 그에 대한 기억을 여기에 몇 자 적어둔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