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징글징글했는데… 연극과 늦사랑에 빠졌어요”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1928~1987)은 “현대인은 15분 만에 스타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예견처럼 요즘은 반짝 스타가 너무 많다. 히트작 몇 편이면 ‘국민 배우’란 타이틀을 달고, 몇 번의 텔레비전 출연과 한두 권의 책으로 ‘국민 멘토’로 불리며, 트위터의 팔로어가 많으면 ‘트위터 대통령’으로 등극한다. 그리고 빨리 비상한 만큼 너무 쉽게 추락한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무대인생 50년 맞는 손숙 “연극 징글징글했는데… ”](https://img.khan.co.kr/newsmaker/1021/20130408_1021_22_2.jpg)
연극배우 손숙씨가 올해 무대인생 50년을 맞는다. 꽃다운 대학생 때인 1963년, <삼각모자>란 연극으로 무대에 선 후 그는 반세기를 연극배우로 살았다. 그것도 대부분 주역이었다. 연기 외에 방송진행자, 작가, 아름다운가게 대표, 장관 등 다른 이력도 화려하다. 최근엔 마포문화재단 이사장직도 맡았다.
햇살이 따사로운 봄날, 정동극장 여피 카페에서 만난 손숙씨는 대본을 읽고 있었다. 시험공부를 하듯 대본을 붙들고 있는 칠순의 여배우에게 50년을 현역으로 버티는 힘을 물었다.
연기생활 50년째입니다. 연극의 어떤 힘이 무대를 50년이나 지키게 합니까.
“나도 한때는 연극이 싫고 징글징글했어요. 40~50대 무렵엔 매일 그만두고 싶었답니다. 당시엔 연극 환경이 너무 척박하고 연극인들도 대부분 가난했죠. 왜 친정도 너무 쪼들리면 가기 싫은 심정이라고나 할까. 주변 사람들을 만나도 ‘혹시 연극표를 좀 안 사줄까? 사달라고 부탁이나 해볼까’란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아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너무 창피하고 대등한 관계가 표를 구걸하는 갑과 을의 관계가 되는 것 같아 속상하기도 했죠. 사실 현모양처가 꿈이었는데 차선으로 선택한 연기여서 연극에 인생을 걸지도 않았어요. 한 10년은 대학로 근처에도 가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아직도 왕성하게 연기활동을 하잖아요.
“연극, 연기와 늦사랑에 빠졌다고나 할까요. 제 의지가 아니라 외부 영향으로 연극무대를 떠난 후에야 연기의 가치를 알고 참사랑을 확인했죠. 환경부 장관에 임명되었다가 <어머니> 공연 때 돈봉투를 받았다는 오해를 받아 죽고 싶었는데 연기가 아니었으면 진짜 죽었을 거예요. 철이 늦게 들었죠.”
최근 연기생활 50주년으로 <어머니> 공연을 하며 ‘장관 자리와 맞바꾼 무대’란 기사도 나왔더군요.
“연극 <어머니>는 1999년 2월 정동극장에서 초연할 때 당시 극장장이었던 홍사종씨, 연출가 이윤택씨(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와 20년간 매년 공연하기로 약속하고 계약서까지 썼어요. 첫 무대부터 엄청난 호평을 받았고 전국은 물론 러시아 공연도 요청받았죠. 그러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부산 공연 중인 5월에 환경부 장관직을 제의받았습니다. 그 제안을 받았을 때 연출가 이윤택씨가 바로 옆에 있었어요. 이윤택씨가 장관이 되더라도 러시아 공연은 국제적인 약속이니 꼭 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타랑가는 러시아에서 아주 유서깊은 극장입니다. 장관 임명장을 받은 직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러시아로 가서 무대에 섰습니다. 일부 언론에선 장관이 무슨 연극을 하느냐는 비난기사도 나왔죠.”
돈봉투의 진실은 뭔가요.
“타랑가 극장에서 한국 배우들이 공연을 한다니까 당시 한국 기업인들 10명 정도가 연극을 보러 왔어요. 그분들이 연극단원들 격려차 십시일반으로 협찬금을 모아 줬죠. 2만 달러였어요. 제가 받은 게 아니고, 공연이 끝난 직후 무대 위에서 연출가 이윤택씨가 그 돈을 받았죠. 저는 꽃다발을 받았고요. 1만 달러는 진주 공연 취소에 따른 보상금으로 썼고, 나머지 1만 달러는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일종의 후원금으로 전달됐죠. 그때 공연이 대성공이라 기립박수가 쏟아졌어요. 기립한 관객들이 무대 위로 꽃다발을 던지면서 ‘마마!(엄마!)’를 연호해서 전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어요. 꽃다발을 품에 안고 서둘러 무대에서 내려오다가 계단에서 낙상해서 팔과 다리를 다쳤습니다. 당시엔 이윤택씨가 돈봉투를 받았는지, 돈이 얼마인지도 의식하지 못한 상태였어요. 그런데 귀국하고 나니 제가 뇌물봉투를 받은 파렴치한 장관이 되어 있더군요.”
그렇다고 제대로 해명도 안 하고 32일 만에 장관직을 그만둔 게 억울하진 않습니까.
“요즘 장관 청문회를 보면 ‘저런 온갖 비리투성이의 사람들도 잘 버티고 당당히 장관직을 수행하는데’란 생각이 들긴 해요.(웃음) 하지만 당시엔 정말 미치도록 자존심이 상하고 자괴감이 느껴지더군요. 업무상 실책이나 실수도 아니고 돈봉투라뇨. 하지만 그무렵 언론들은 걷잡을 수 없이 공격을 해서 감당하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덧정이 없었어요. 제가 장관의 권위를 누리기 전에 재빨리 그만둔 것이 오히려 잘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장관직은 왜 맡으셨어요.
“제가 신문잡지에 칼럼도 쓰고, 환경단체 일도 하고 해서 김대중 대통령은 물론 정치인들과도 교분이 있어요. 국회의원도 몇 번 제안받았지만 다 거절했죠.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보자고 해서 만났더니 환경부 장관 제의를 하더군요. 전 대통령과의 청와대 독대가 그렇게 중요한 의미인 줄도 몰랐어요. 처음엔 거절했죠. 그런데 김 대통령이 ‘평소 환경문제에 관심도 많으니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걱정말라고 하더군요. 생각해보겠다고 했는데 다음날 신문에 보니 제가 장관에 임명된 기사가 실렸어요. 제가 꿈이 야무졌죠.(웃음) 영화배우 출신으로 그리스 문화장관을 한 멜리나 메르쿠리처럼 열심히 일하고 사랑받는 장관이 되어야겠다, 환경도 문화수준을 높여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한·중 환경장관 회의에도 참석하고 직원들과도 호흡이 잘 맞았는데….”
장관직을 그만둔 것을 후회합니까.
“아뇨. 김대중 대통령 퇴임 직후에 동교동을 찾아갔었는데 ‘손 선생, 그때는 미안했습니다. 미친 바람이 불 때였습니다. 내가 손 선생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배우로 거듭났어요. 아마 그 일이 없었다면 정치에 맛이 들려 연극을 그만뒀을지도 몰라요. 그 사건을 겪으면서 연극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무시당하는지를 겪었고, 나한테 주어진 운명은 ‘배우의 삶’이라는 걸 진심으로 알게 됐습니다. <어머니>는 영광과 상처의 기억을 남겼지만 배우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준 작품이죠.”
충격으로 무대 복귀가 쉽지 않았을텐테요.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펑펑 울고 지냈는데 친구들이 미국 여행을 권했어요. 그동안 연극하랴, 라디오방송 진행하랴, 제대로 휴가나 여행도 못했는데 쫓기듯이 미국으로 갔죠. 열흘 정도 요세미티, 그랜드 캐니언 등을 친구와 <델마와 루이스>란 영화처럼 돌아다니니 몸과 마음이 추슬러지더군요. 귀국했더니 평생 스승이신 임영웅 선생님(극단 산울림 대표 겸 연출가)이 전화를 주셔서 대뜸 ‘연극하자’고 하셨고, 라디오방송에서도 제안이 들어와 빨리 제자리로 돌아온 셈입니다.”.
<어머니>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연극이 거의 여성사적인 내용입니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그런 것 같아요. <위기의 여자> <담배 피우는 여자> <셜리 발렌타인> <엄마 안녕> 등의 작품에서 주로 신산한 삶의 여주인공을 연기했죠.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고백하는 남편 앞에서 허물어지는 ‘위기의 여자’를 비롯해서 운명에 휘둘리며 고통받는 여자, 혹은 세상의 완강함에 날개 부러진 영혼들… 그런 여자들을 연기하며 속으로 울고 또 울었어요. 그런 쓰라림, 눈물, 한숨들을 관객들과 나누면서 한국 여성들의 의식이 정말 엄청난 속도로 발전한 것을 느낍니다.”
![[유인경이 만난 사람]무대인생 50년 맞는 손숙 “연극 징글징글했는데… ”](https://img.khan.co.kr/newsmaker/1021/20130408_1021_22_1.jpg)
MBC <여성시대>를 시작으로 라디오 진행도 25년째죠.
“아, 정말 라디오 프로그램이 저를 사람 만들어주고 먹여 살려줬어요. 연극계에서 나름대로 인정받고 성공도 했지만 밥먹고 살기는 여전히 힘들었어요. 연극하던 남편(김성옥 목포시립극단 예술감독)이 사업에 실패한 후 빚더미에 올라 끝이 안 보이던 때에 라디오 진행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고정수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1989년부터 MBC <여성시대>를 진행하다보니 라디오가 정말 매력적이더군요. 저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청취자들의 사연을 읽으며 펑펑 울기고 하고 용기도 얻었어요. <여성시대>만 10년, 다시 SBS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8년, CBS에서는 한대수씨와 진행하는데 5월이면 5년째예요. 한대수씨는 미국에서 성장해서 엉뚱한 말을 자주 해요. 전라도 벌교를 이야기하면 ‘벌교가 어떤 종교냐’고 묻고 ‘천고마비’를 ‘천미터 높은 곳에 올라가면 온몸이 마비된다’고 풀이할 만큼 엉뚱한데 청취자들이 무척 재미있어 해요.”
그밖에도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며 수십개 단체와 인연을 맺었는데 어떤 일이 가장 보람 있습니까.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하루 200~300통씩 오는 청취자들의 편지에는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가 담겨 있어요. 여성과 환경문제 등에 대해 공부도 따로 하면서 칼럼과 강연 등을 통해 사회에 대한 발언도 조금씩 하게 됐죠. 이런저런 인연으로 부탁하는 일을 하다보니 아름다운 재단 대표도 맡았고 금호아시아나 문화재단 일도 벌써 10년째 하고 있네요. 다 자원봉사인데 몸으로 봉사할 때 저도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그 가운데 아름다운 재단은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 같아 공동대표를 그만두고 이사로 있지만 보람이 컸어요.”
그 어떤 연극보다 드라마틱힌 삶을 사셨는데, 요즘 강의 몇 번이나 책 한두 권으로 국민 멘토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요즘 국민이란 말이 너무 함부로 쓰이는 것 같아요. 국민들이 언제 그들을 멘토로 삼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어떤 분야건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뜨면 금방 추락할 수밖에 없죠. 차근차근 한 계단씩 밟아야 정상에 섰을 때 자신도 뿌듯하고 남들도 인정해줄텐데요. 인생이 긴데 왜 그렇게 성급하게 오르려고만 하는지….”
4월에 또 연극무대에 서죠?
“내가 미쳤다니까요. <어머니> 공연도 ‘이건 우리 엄마랑 이윤택 감독 엄마가 하늘에서 돕는 게 분명해!’라면서 매번 대사를 까먹지 않는 걸 감사했는데, 이번에도 대사가 하염없이 긴 것, 게다가 치매환자의 독백이 많이 온통 뒤죽박죽인 대사를 외워야 하는 연극을 해요. 12일부터 <나의 황홀한 실종기>란 연극을 하는데 2013년 산울림의 첫 번째 창작무대이자 배우 손숙의 연기 50년 특별공연이에요. 번역가인 오증자 선생의 첫 창작극이기도 합니다. 치매환자라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게 오 선생의 주장이에요. 제가 주변에 ‘난 천재소녀야’라며 대본을 줄줄 외우는데, 한 번 들어볼래요?
기억의 파편들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산산이 흩어져 있지만 나는 그것들을 끌어모아 퍼즐을 꿰맞추듯 나의 인생을 완성한 다음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나는 나의 이 힘든 여정을 누구에게라도 이야기하고 싶다. 왜냐고? 치매환자의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나의 80년 인생을 마무리하기 위해, 내가 살아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이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므로….
올봄,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실종을 위해 손숙씨는 대본을 부여잡고 밑줄을 긋고 있다. 50년을 무대에 섰지만 무대는 항상 두렵고 경외롭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그의 연기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숨소리와 표정, 박수갈채가 그에겐 가장 효력있는 영양제라고 했다. 양심이 실종된 사회, 도덕이 치매 수준인 사회에서 한결같은 자세로 <나의 황홀한 실종기>를 준비하는 손숙씨는 참 아름답게 보인다. 나이먹기는 쉬워도 어른이 되기는 힘들고, 아름다운 어른이 되기는 더더욱 어려운데 말이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