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의 꿈’과 제2의 한강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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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카시미롱이 들은 새 이불이 / 어젯밤에는 새 책이 / 오늘 오후에는 새 라디오가 승격해 들어왔다. (김수영, <금성라디오>, 1966)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76)

김수영은 196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고, 조세희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다. 우리 전후 현대문학사를 빛낸 두 사람을 새삼스레 떠올리게 된 것은 2월 25일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사 때문이었다. 취임사 제목은 ‘희망의 새 시대를 열겠습니다’였다. 그 핵심 메시지는 국민 모두가 함께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취임 직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발표한 5대 국정목표에서 빠진 경제민주화를 언급해 이에 대한 비판을 나름 배려하기도 했다.

조세희 작가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표지.

조세희 작가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표지.

취임사에서 내 시선을 끈 것은 ‘제2의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강의 기적을 네 번 반복했는데, 이 말은 내게 여러 의미로 다가왔다. 한강의 기적이란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에 대한 대표적인 은유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 말을 수차례 되풀이한 것을 보면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과 아버지 시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학계의 해석은 상반된 견해가 존재한다. 한편에선 박정희 시대가 본격적인 산업화를 모색했고,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했고, 의료보험을 포함한 복지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던 것으로 평가한다. 앞서 인용한 김수영의 시처럼 어제는 카시미롱 이불이, 오늘은 라디오가, 내일은 텔레비전과 냉장고가 차례로 집안에 들어오던 고도성장 시대였다.

다른 한편에선 박정희 시대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한 독재체제인 유신체제로 1970년대를 지배했고, 현대적 빈부격차 및 노동자계급의 빈곤이 사회문제로 등장했던 것으로 비판된다. 앞서 인용한 조세희의 소설처럼 자본주의의 그늘이 본격화한 시기가 다름 아닌 박정희 시대였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유신시대라 불리는 1970년대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빈곤을 상징하는 연작 소설이다. 발표 당시 이 소설은 두 가지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첫째, 이 작품은 산업화 시대가 등장시킨 노동자계급의 상황을 본격적으로 조명한 대표적 노동소설이다. 이 소설은 일용 노동자 가족의 강제철거와 이로 인한 아버지의 자살, 그리고 그 아이들이 노동자가 돼가는 과정을 다양한 시점에서 다룬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과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고도성장에 가려진 노동자계급의 생존에 가까운 삶을 이 소설은 생생히 증거한다.

둘째, 조세희는 전통적 수법이 아닌 네오리얼리즘과 유사한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세계를 묘사한다. 시점 이동, 시간 중첩, 단문의 반복 사용, 환상적 상황 설정 등의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 당시 빈부격차의 현실을 그는 더없이 아프지만 감동적으로 전달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적절히 보여주듯이, 박정희 시대는 명암이 뚜렷한 시대였다. 우리 사회를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변화시키고 고도성장을 가져온 시대였던 동시에, 현대적 빈부격차가 본격화하고 인권과 민주주의가 부정된 시대였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박정희 시대를 상징하는 한강의 기적에 ‘제2의’라는 수식을 붙이는 것이 갖는 복합적 의미다. 보수세력에게 박정희 시대는 재현하고 싶은 ‘영광의 20년’일 수 있다. 하지만 진보세력에게 박정희 시대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고뇌의 20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상반된 평가를 받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통합을 중시해야 할 국정운영에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취임식을 마친 뒤 차량으로 향하며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박근혜 대통령이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취임식을 마친 뒤 차량으로 향하며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아직 집권이 3주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들을 추진할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일자리 중심의 창조경제, 맞춤형 고용·복지, 창의교육과 문화가 있는 삶, 안전과 통합의 사회, 행복한 통일 시대의 기반 구축 등 인수위가 표방한 5대 국정목표를 보면, 박근혜 정부의 국정기조는 ‘신자유주의적 토건국가’를 지향했던 이명박 정부와 비교할 때 나름대로 진일보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연관해 나는 박근혜 정부에 부여된 최우선의 과제 중 하나는 분열된 공동체의 복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른바 ‘두 국민(two nations)’ 사회를 ‘한 국민(one nation)’ 사회로 재구조화하는 것을 뜻한다. 두 국민이라는 말의 기원은 영국 보수당의 역사적 기반을 구축한 벤저민 디즈레일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9세기 산업화 과정에서 부자와 빈자로 극단적으로 나눠졌던 두 국민을 한 국민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세계화 시대에 두 국민의 경향이 우리 사회에만 관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그 경향은 매우 심각하고 또 구조화해 가고 있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양극화 경향에서 볼 수 있듯이 마치 두 개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 사회는 뚜렷하게 나눠져 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산업화 시대로의 과거회귀적인 게 아니라 세계화 시대로의 미래지향적 시각에서 사회통합을 새롭게 일구고, 한 국민의 공동체를 복원하는 데에 박근혜 정부의 일차적 과제가 놓여 있다는 점이다.

살기가 너무 힘들다. (…) 그래서 달에 가 천문대 일을 보기로 했다. 내가 할 일은 망원렌즈를 지키는 일이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주인공 난장이가 둘째아들 영호에게 하는 말이다. 난장이는 달나라로의 여행을 꿈꾼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벽돌공장 굴뚝 속으로 떨어져 죽는다.

이 연작 소설은 1970년대 중·후반에 발표됐다. 40년이 흐른 지금, 그 난장이들이 모두 사라진 것일까? 보수의 진정한 의미는 찢겨진 공동체의 복원에 있다. 난장이들 역시 한국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라면, 박근혜 정부가 보수적 가치를 진심으로 중시한다면, 그들을 적극 배려하는 정책을 결코 외면해선 안 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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