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음악담당 기자로 일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의 저자는 “거의 80년대 내내 (클래식 음악은) 한없이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혹인 동시에 단절해야 할 허영의 취향이었다”고 고백한다.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문학수 지음·돌베개·1만8000원
호사가들은 흔히 ‘클래식이 어렵다는 건 편견’이라고 말하길 좋아하지만, 그 말에 동의하는 이들은 소수의 클래식 애호가들뿐이다. 물론 순식간에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사랑스럽고 친근한 곡들이 있다. 그러나 애호가들이 ‘정전’ 목록에 올려놓은 곡들은, 문학사나 영화사의 고전들이 그러하듯, 그 아름다움에 접근하는 데 감상자의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클래식 음악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클래식 음악이 동시대의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악의 핵심 레퍼토리는 대개 17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몰려 있다. 시대의 변화가 단순한 시간의 누적이 아니라 문화와 감수성의 변화까지 포함하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50년 전 비틀즈의 음악과 250년 전 바흐의 음악이 동일한 높이의 진입장벽을 갖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사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한국 클래식 문화가 음악 수용 과정에서 일본 애호가들의 오타쿠적인 클래식 숭배에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클래식은 통념적으로 ‘고상한 문화’이자 ‘속물적 허영’이라는 이중의 장벽 안에 갇혀버렸다.
저자는 그럼에도 “모든 음악은 개인과 당대를 품으면서 하나의 맥락을 형성한다. 우리는 그 맥락을 접하면서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마음 아파하며, 어떤 경우에는 미움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고 말한다. 클래식 음악에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호소력이 있다는 얘기다. 본향인 유럽에서조차 애호가들이 고령화·소수화하는데도 클래식 음악이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다.
책은 바로크부터 현대에 이르는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작곡가와 연주자의 생애를 통해 풀어나간다. 저자는 한 작곡가의 생애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그의 음악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하면서, 음악의 성감대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세심한 손길로 더듬는다.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것은 음악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것을 신비화하거나 탈역사화하지 않으려는 저자의 긴장된 의지다. 바그너 음악의 반유대주의 혐의나 지휘자 카라얀의 나치 전력에 대해 말할 때 그런 긴장이 두드러진다. 책의 부제가 ‘어느 인문주의자의 클래식 읽기’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